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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의 손에 (30) 해산의 고통과 노동

최우성 박사 (생리학, 창조과학선교회)

산부인과 병원에 가면 통증의 정도를 표시하는 그림이 벽에 붙어 있다. 보통은 얼굴 표정과 함께 통증의 정도를 표시하는 수가 0에서 10까지 단계로 되어있다. 아픔이 전혀 없는 상태는 0으로 표시하고 2정도까지는 웃을 수 있는 정도, 그리고 점점 올라가 8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심각한 정도다. 간호사들은 가끔 산모에게 통증이 어느 정도 되는지 물어본다. 언제 아이가 태어날 지 짐작하기 위함이다. 최고의 아픔은 10인데 이 아픔과 비교되는 다른 아픔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통증이 10에 도달했을 때 드디어 아이가 태어난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pain)을 몇 배로 증가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3:16 NASB). 죄를 짓지 않았어도 아이를 출산할 때 고통이 따를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나 고통지수 10에서 몇 배로 나누면 아무리 아파도 3-5 정도의 통증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디자인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이 정도라면 여성들이 아이 낳는 일을 크게 염려하지 않고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기대와 기쁨으로 더욱 행복한 임신 기간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자녀를 여럿 낳은 아내는 ‘즐긴다’는 표현에 강한 의문을 달았지만 이것이 바로 낙원과 저주의 차이인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해산의 고통을 크게 더하셨을까? 증인 없이 이런 질문에 답하기란 정말 곤란하다. 생리학적으로 생각해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보다 수가 높으시다. 결론은 고통이 증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픔을 느끼는 통점과 압점의 수나 민감도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고 뼈를 비롯한 몸의 구조가 살짝 바뀌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분명한 점은 창조 당시의 생리학적인 그리고 유전적인 구조나 관계가 타락사건으로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바뀌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예들은 사람들을 위해 창조되었을 수많은 세균들이나 바이러스들이 지금은 오히려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키거나 가축이나 농산물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현상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범죄한 아담은 남은 평생 고생스럽게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창3:17, 19). 성경은 그 이유를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땅이 예전처럼 효력을 내지 않게 된 것인데 역시 이로운 미생물들의 수가 줄어들었는지, 미생물들의 능력이 떨어졌는지, 작물들과 땅의 관계가 바뀌어 작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모두 다인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예전과 비교해 훨씬 적은 수확량이었다. 이런 흉작이 아담(인류)의 평생 동안 계속 되게 된 것이다. 당연히 필요한 수확량을 거두기 위해서는 힘든 일을 하여 이마에 땀이 흘렀어야 했다(창3:19). 아담에게 주어진 가장 큰 형벌은 평생의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담은 이제 죽어 썩어지고 흙이 될 것이다. 아담에게 속한 하와도 아담과 함께 죽고 모든 창조된 생명체들도 죽어 흙이 되게 되었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1, 22). 아담은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되어(시8:5) 하나님의 계속되는 공급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매우 제한적인 공급만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다가 죽어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된 것이 가장 비참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인 큰 고통과 노동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배려도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인 남자와 여자에게 고통을 더하고 수고를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하신 것은 결국 형벌의 목적이 아니었다. 고통을 느끼는 통점이나 압점은 정상적인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부모님의 부드러운 터치도 몸에 가해지는 위험도 느낄 수 없다. 또 우리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놀고먹는 세상이 에덴이 아니었다. 체육과 오락을 통하여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 문제는 견디기 어려운 통증과 힘겨운 노동이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고통과 힘겨운 노동마저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남겨주신 은혜인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대한 소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아담은 오실 구원자를 알았고 기다렸다.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 옷이 입혀졌다(창3:21). 아담은 여인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가 온다는 메시지도 받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3:15). 머리 좋은 아담과 하와는 가죽옷과 이 말씀의 의미를 금방 알아 차렸을 것이다. 아담은 그 기대를 담아 지금까지 이름이 없었던 자기의 아내에게 ‘하와’ 즉 ‘생명’이라고 불렀다. 아담 본인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고전15:22) 여인의 후손인 ‘마지막 아담’을 통해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이란 의미를 가진 하와가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창3:20). 이 사실이 적혀 있는 성경을 신화로 혹은 설화로 전락시켜버린 크리스천들이 참 많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되고 실재가 되는 사건들을 사실이 아닌 이야기로 주장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교회의 근본을 헐고 있는 것이다. 현재 급감하고 있는 서구와 한국 교세의 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여기에는 과학의 탈을 쓴 거짓 이론인 진화론의 영향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고통지수 10은 무엇일까? 자기 형상인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일 게다. 그들이 넓은 길로 가기 때문이다. 이메일: mailforws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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