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콘웰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창1장-31절 하나님을 창조의 유일한 주체로 서술
시104편-35절 하나님을 피조물에게 송축 받으실 유일 대상으로 선포
종교개혁 이후 교회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맥락에서 인지하게 된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sacra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고 표현되는 원리이다.
이 원리를 따라 창세기 1장을 읽고자 할 때 우리가 펼치게 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시편 104편이다. 창세기 1장이 31절에 걸쳐 하나님을 창조의 유일한 주체로 서술하고 있다면(“태초에 하나님이…”) 시편 104편은 35절에 걸쳐 하나님을 피조물로부터 송축 받으실 유일한 대상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 선포는 ‘나’를 일깨움으로 시작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4:1a).
창세기 1장 1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한 문장에 그 장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듯이 시편 104편 1절 역시 장 전체에 걸쳐 다룰 하나님을 송축할 이유를 1절에 요약해 담고 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시104:1b).
시편 104편 1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접하는 우리에게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반응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의 “위대”하심을 아는 것이며 그 분께 왕의 “존귀와 권위”가 속했음을 깨닫는 것이고, 이 지식은 곧 하나님을 송축함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시104:2a).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빛이 있게 하신 창세기 1장 3절의 역사는 시편 104편으로 자리를 옮겨 그 빛을 “입으시”는 창조주께로 초점이 맞춰지고,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신 창세기 1장 7-8절의 역사는 시편 104편의 문맥에서 하늘에 성막을 치신 역사로 깨달아져 다시 한번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한다: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시104:2b-3a).
여기서 “휘장”(yərîʿâ)은 다름 아닌 성막의 휘장을 가리킨다: “너는 성막을 만들되…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ʿeśer yərîʿōṯ, 출26:1; 그 외 출26:2, 8; 민4:25; 삼하7:2; 대상17:1).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왕으로서 거하실 장소로 짓게 하신 성막, 또 그 처소를 수축하며 견고히 세우고자 할 때 “들보”를 얹어 짓게 한 성전(대하34:11)과 관련된 표현들은 하나님이 왕이시며 하늘을 만드심이 곧 그의 궁, 즉 성전을 지으신 것임을 시편 104편은 밝히고 있다.
존 D. 레븐슨(Jon D. Levenson)의 발제 이후로 성막건축과 창조기사 간의 유사성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근래에 큰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시편은 이미 그 옛날 구약시대에 그 연관성을 규정하고 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날, 하나님은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하시어 “땅이라 부르시고” “바다라” 부르시며 땅에 “풀”과 “채소”와 각종 “열매 맺는 나무”를 내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다(창1:9-13). 이 창조의 역사는 시편 104편 저자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해가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산과 바다를 나뉘게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사이의 경계가 지켜지도록 주장하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9).
그런데 그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러한 물과 땅 사이에 경계를 완전히 닫아두신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열어 물로 하여금 땅을 적시게 하는 영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들나귀들도 해갈하며…/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104:9-15).
이렇게 땅과 물의 경계를 조절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만드신 생명체를 지키고 가꾸시며 사람의 얼굴의 윤택함과 마음의 기쁨, 힘을 살피시고자 내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이러한 지식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넷째 날의 창조 역시 하나님이 생명의 주이시라는 선포를 계속 이어간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시104:19-23).
산과 바다를 넘어 해와 달까지도 생명을 지으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그 뜻을 받든다는 말씀이다. 심지어 흑암, 즉 밤하늘까지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지식은 시편 저자로 하여금 창조주 안에서 얼마나 큰 자유를 누리게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흔히 성경은 현대 과학 이전의 저술이어서 지동설을 낳게 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시편 104편과 함께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성경은 지구를 천체의 중심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그 중심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고(창1:18), 시편 저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탄성을 내게 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시104:24).
다섯째 날,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1) 하신 역사를 두고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시104:25-26).
고대인들이 크고 두렵게 여겼던 바다조차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한 영역이며 그 안의 생명체도 다 창조주 하나님이 두신 것이라는 지식은 다시 한번 시편 저자를 놀라게 했다. 땅과 밤하늘을 포함해 깊은 바다의 세계까지 하나님의 왕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그 바다에 배를 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역량을 잘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 날 하나님은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창1:25)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다(창1:27-28). 이 창조 역사에 대해 시편 104편 저자는 다음의 시각을 더한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8-29).
즉, 창세기 3장 이 편에서 여섯째 날을 보고 있는 것이다. 혹, 이러한 관점이 창세기 1장을 읽는데 제한적 요소를 더하고 있지는 않을까 의문이 들겠지만 사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그 사건 이전의 시각으로 창조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한계는 현대과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관찰되어지는 현상을 바탕으로 체계를 갖추는 과학이 관찰할 수 있는 타락 이전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104편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시104:30-31).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새롭게 하시며 그 결과로 땅도 새롭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 백성을 새롭게 하실 것,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약속이 창조역사에 이미 배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기에 예수의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성도가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드릴 고백은 시편 104편 저자의 고백과 다를 수 없다: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시104:33-34).
그리고 이 고백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구속함을 얻은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고백이다: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시1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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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