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청교도 이주 400주년 기념 책자 저자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5)사회윤리관(Social Ethics View) 회복과 부흥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윤리(倫理)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 인륜(人倫)”을 말한다. 영어로는 Ethics, 독일어로는 Ethik인데, 이 말은 헬라어의 Ethos에서 나왔다. Εθος(Ethos)라는 말은 ‘관습’이나 ‘전통’을 의미하고, 율법에 의해 규정된 ‘관습’이나 ‘실천’을 의미하는 경우에 쓰인다. 그러므로 Εθος는 인간이 행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청교도 신앙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완전하다는 믿음 위에 기초한 실천생활방식이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만큼 철저한 도덕주의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랄프 버튼페리(Ralph Barton Perry)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와 퓨리터니즘’(Puritanism and Democracy)에서 청교도들을 도덕선수라고 불렀다. 그 중 전형적인 도덕선수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매튼 매더이다.
그렇다. 기독교윤리,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의 기준은 성경이며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든 인생들에게 그리고 특히 성도들에게 최종적 절대적 권위이다. 일반윤리의 개념과 같이 사람의 전통이나 관습이, 개인이나 사회의 유익과 즐거움과 행복이, 심지어 사회의 여론이 윤리의 기준이나 최종적 권위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최종적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2, “성경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명칭 아래 현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법칙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생활에 정확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오웬(John Owen, 1616-1683)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땅의 삶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이다.” 그는 또 말했다. “거룩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 의무를 실행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바르게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도덕적 명령, 예를 들어, 부모공경,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을 금지한 것은 선악의 분명한 판단 규정들이다. 또한 낙태와 안락사 그리고 자살은 살인죄이며, 특히 동성애(Homosexuality)는 최고의 음란죄(창19:23-28, 롬1:26, 27)이며 선의의 거짓말, 또 돈과 재물에 대한 사랑(딤전6:10)도 허용될 수 없는 죄악이다.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중립적 행위들이나 의식들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한다. 예를 들어, 포도주나 술을 마시는 문제에 대해 성경은 그 행위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과도하게 마셔서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요(엡5:18), 심지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큰 죄로까지 간주된다(고전6:10; 갈5:21).
우리 그리스도인이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를 억제하여야 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다루어 ‘죄 죽임의 교리’(A Doctrine On Mortification)를 강조한다. 이 땅에서 완전한 거룩이 불가능하지만 청교도들은 거룩의 최고봉에 이르기 위한 열망으로 완전한 거룩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 이외의 교회사에서 가장 거룩한 무리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탁월한 거룩은 그들의 특징인 동시에 그들의 능력이 되어서 자신들의 시대는 물론 지금껏 남긴 글을 통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칭찬을 받지만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범죄다. 결혼의 침대는 축복받지만 간음은 정죄되었다. 청교도들은 자연적 감정을 정죄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이 아닌 감정을 정죄했다. 청교도들은 인간의 욕망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의 예속되는 것을 정죄한 것이다. 즉, 성욕의 만족에서 발견되는 쾌락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만족한 부부간의 성욕을 더 더욱 자극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手段)으로서 욕정을 정죄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죄와 싸움을 했으며, 그들의 생활은 참으로 전투적이었다. 즉 청교도들은 성경을 바탕으로 한 윤리적 도덕적 선한 싸움을 행한 자들이었다.
6)성경적 경제관(Biblical Economic View) 회복과 부흥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19-20).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인 플리머스 필그림들에게는 경제적 궁핍이 종교적 정치적 이유와 더불어 신대륙으로 이주케 한 주요 이유요 동기였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자신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청교도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한 세기에 이르는 논쟁의 불씨를 제공하였다.
청교도의 생활원리 기준은 성경, 윤리적 도덕적 선한 싸움 행해
자본주의는 청교도신앙에 기원, 소명으로서 직업에 새 의미부여
자본주의의 정신을 이루는 루터와 칼빈의 강력한 공헌은 직업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부여였다. 막스 베버가 칼빈주의는 근대 자본주의에 모체라고 했지만, 진정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에 기여한 것은 유럽에서보다도 신대륙의 뉴잉글랜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Capitalism)의 기원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자본주의가 개신교 윤리에, 더 정확히 말하면 청교도 신앙(Puritanism)에 기원을 둔다는 것이다.
(1)노동(勞動)과 직업(Labor and Occupation)-청교도의 노동관은 모든 노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맡겨졌다는 것이다. 영국의 청교도 개혁자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악한 맘몬의 비유”(The Parable of the Wicked Mammon)에서 외견상으로 보면 “접시를 닦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직업의 성직화를 주장하였고,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양을 지키는 목자의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재판관, 행정관료, 또는 설교하는 목사의 일만큼 거룩하다”고 서술하면서 모든 직업의 신성화를 주장하였다.
“청교도들은 모든 합법적인 직업은 신성하다는 것을 강조한 신교의 노동 윤리의 충실한 추종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직업을 통해 훌륭하게 섬김을 받으실 수 있으므로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근면하게 수행되어야 하며 비록 일을 한 결과 부를 얻었을 때 싫어할 사람은 없지만 단지 부를 모으기 위해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1분이라도 아끼고자 노력한 청교도들에게 있어 좌우간 자신의 직업에 바쁜 것은 본질적으로 옳은 것이었다.”
그렇다. 노동은 바로 직업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통상 우리는 직업이라고 할 때에는 영어로 Vocation이라고 쓴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의 보카치오(Voc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의미는 ”부르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직업을 소명이라는 말로서 콜링(Calling)이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막스 베버도 이러한 의미에서 독일어 베루프(Beruf)는 영어의 콜링(Calling)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육이원론(Dualism)” 입장에서 노동을 경시했는데, 고대인들 중에도 노동을 찬양한 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대중 가운데서 가장 나은 사람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이라고 했으며, 시세로(Cicero)도 ”농사보다 더 좋은 일이 없으며, 자유인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소위 사제의 직업을 “성직”이라고 하였고, 이는 다른 직업의 우위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Luther)에게 있어서 “만인제사장직분”은 모든 건전한 직업이 다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거룩한 것이라고 보았다.
중세 라틴격언에 ‘Laborare est orare’(라보라레 에스 오라레)란 말이 있다. ‘일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렇다.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Calling)이었다. 이 소명에 응답하는 삶은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거룩한 삶은 수도원에서 은거하며 종종 주발을 들고 구걸을 하는 “탁발수도사”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직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모든 노동자의 삶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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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