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뜨거운 신앙
한국교회 성도들은 뜨거운 신앙을 지니고 있다. 초창기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모습에 고스라니 드러났다. 주일이 되면 하루 종일 교회에서 지내면서 예배와 성경공부, 그리고 봉사와 노방전도에 전념하는 것을 성도의 기본으로 간주하였다. 교회건축이 한창 진행될 때에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힘에 부치는 헌금을 드렸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다. 현대교회에도 뜨거운 신앙의 전통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1년 내내 교회행사가 지속되지만 적지 않은 숫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물질과 시간을 바쳐 교회봉사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수양회나 단기 선교에 참여하는 위해 휴가를 내는 경우도 있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신앙의 특징이 기도생활에 가장 잘 나타난다. 철야기도, 산상기도, 금식기도, 작정기도, 연속기도 등 다양한 기도모임이 있다. 새해금식기도 또는 수능자녀기도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도 모인다. 각 교회마다 성도들에게 기도의 기회를 주기 위해 다양한 모임을 열고 있다.
뜨거운 기도는 신학과 교리의 구분을 넘어 한국교회의 특징이 되어왔다. 성도들은 기도할 때 ‘성령 충만’하길 간절히 원한다. 그중 한국교회의 영적 원동력이 되어온 기도모임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열매로 시작된 새벽기도이다. 신앙의 선배들은 경건한 신앙을 지속하기 위해 기도에 힘써야 함을 깨닫고 꾸준히 실천하였다. 큰 소리를 내는 통성기도 역시 한국교회의 전형이다. 오순절교회로부터 시작된 ‘주여 삼창’에 대해 찬반논쟁이 있지만, 보수적 교회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부흥회나 수양회와 같은 특별 집회에서는 열정적으로 박수치고 찬양하며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일반이다.
현대교회에서도 뜨거운 신앙이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성도들의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하다보면 진정성을 상실하고 외식하는 신앙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뜨거운 신앙을 지닌 성도들 모두 이런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진정성은 본인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문제이다. 타인의 신앙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뜨거움을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신앙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출발되고 성숙되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맹점이 있다. 외식이 없는 순전한 뜨거움은 각 성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갈망이지만 뜨겁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지 않아 혼동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내적 열망이 외부 행동으로 연결되어 드러나는 과정에서, 각자의 신앙적 배경과 경험, 그리고 개인 성격과 성향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 뜨거움이 인간의 감정이 신비적 요소와 결합되는 경우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전혀 다른 형태의 주관적인 신앙을 지니게 된다.
전래 종교
젊은 서양 선교사들의 한국생활은 매사가 낯설고 불편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885년 4월에 첫발을 디뎠던 호래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의 기도문에 그들의 복잡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로 시작한다. 이후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에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힘들어했다. 그 당시 조선은 강경한 쇄국정책으로 외부와 담을 쌓았던 은둔의 나라였다. 1873년 대원군이 하야한 뒤에 외국과 외교사절을 교환하면서 조금씩 눈을 넓혀갔지만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더욱이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이 국정에 개입되면서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서양 선교사를 처음 대하던 조선인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자신들을 찾아온 이방인에게 마음을 열며 다가가는 것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열악한 선교 상황에 굴하지 않았다. 언더우드의 기도문을 통해 선교사들의 결단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으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목숨을 바쳐 죽기까지 부르짖은 간절함에 오직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선교사들은 복음의 열매를 맺기까지 수고의 땀을 흘려야 했다. 서울 합정동에 소재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찾을 때마다 조선을 위해 삶을 바쳤던 선교사들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초창기에 그들이 쏟은 희생과 사랑에 고개가 숙여진다.
조선인들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랐던 선교사들의 공이 크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조선인들이 매우 종교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활동하기 1세기 전 조선에 ‘서학’이란 학문으로 가톨릭신앙이 소개되었다. 그 중심에는 최초 신자이자 신앙공동체 형성에 기여한 이벽(1754-1785)이 있다. 그는 서적을 통해서 새로운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서양의 신학이 지닌 주제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천주교는 이승훈과 정약용 등을 중심으로 종교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조상숭배를 거절하는 천주교인들은 전통적 유교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집단이라고 판단하여 심한 박해를 가하였다. 이때 많은 성도들이 순교 또는 유배를 당하였다.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전래종교인 유교와 불교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활동할 당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당시 유교는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이라기보다 도덕적 가치를 실현함으로 이상적인 사회구현을 목표로 하였던 실천적 학문이자 정치 신념이었다. 또한 불교 역시 종교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신도들에게 특정한 사상에 대한 몰입이나 광신적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 수양과 윤리적 삶을 중시하는 가르침이 한국인의 정서 구조 안에 아주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님 신앙
조선인들은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환경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종교적이지 않은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견해가 옳다. 다행이 전래종교는 타 종교에 대하여 관대한 특징이 있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 대해 노골적인 핍박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전래종교가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자리매김한 상황 속에서 서양인에 의해 새롭게 전해진 기독교가 한국인 고유의 종교성과 어떻게 접목되었을까? 현대 교회의 신앙적 뿌리가 지닌 특성을 밝혀낼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한국인들의 종교성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준 것은 다름이 아닌 샤머니즘적 신앙이다. 앞에 언급된 유교와 불교의 경우에도 샤머니즘 신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 하에서 출발하였다. 샤머니즘 신앙은 원시 종교였다. 조직화된 특정 교리나 심오한 사상을 지니지 않았지만 지상의 모든 무생물과 동식물에 혼령이 붙어있다고 믿는 정령신앙에 근거한 다신론을 그 기초로 하였다.
많은 민족이 샤머니즘 신앙은 지녔지만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숭배하는 여러 신들 중에 ‘하늘님’을 우두머리 신으로 섬긴 것이 특징이다.
하늘님은 이 세상과 구별된 곳에 거하면서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신이다. 그에게는 풍요와 벌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바치면 반드시 보상하여주는 신이다. 그렇기에 샤머니즘 신앙은 하늘님에 대한 굳은 결심이나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어도 절대적인 힘을 지닌 그에게 공손하고 열심 있는 태도를 요구하였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늘님은 지극정성으로 섬겨야 하는, 막연한 개념의 초월적 신이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성경을 통해 구원계획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전했다. 그런데 조선인들이 놀라울 정도로 속히 잘 이해한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초기에 사용한 ‘하나님’이란 단어에 ‘하늘님’의 뜻을 내포되었기 때문이다.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선교사가 1887년에 중국에서 최초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할 때, 하나님(God)을 ‘하늘’과 ‘님’을 합쳐 ‘하느님’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초기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조상대대로 섬겨오던 하늘님을 머리에 떠올리며 하느님을 이해한 것이다. 단어의 유사성이 주는 유익이 컸지만 동시에 초기 성도들에게 매우 위험한 신앙적 함정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하늘님’에 대한 이해가 뚜렷하지 않았던 것처럼 성경의 하나님도 분명하지 않고 어렴풋하게 깨닫는 경향이 있었다.
자기 소원성취위해 절대자를 대면하려는 한국적 신앙정서 버려야
뜨거운 신앙행위 이전에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 맺고 있는지 점검
한국적 신앙
기독교는 조선에서 샤머니즘적 신앙과 혼합된 독특한 형태로 시작되었다. 성도들은 애매한 신관으로 인해 ‘지성이면 감천’이란 사상에 젖어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종교성을 쉽게 벗어버릴 수 없었다. 이는 한국인 특유의 ‘한’과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매우 복합적인 감정의 형태로 드러나기에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내면화된 이 울분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한국인들의 정신구조에 자리매김 한 샤머니즘 신앙의 토양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초기 성도들은 하늘님을 섬기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다. 그 하나님은 ‘하늘님’과 유사하시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공급하는 신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신앙인의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할 수 있던 절대적인 존재였다. 특별한 요구나 강요가 없이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초월적인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숭배하며 섬겼다.
애국가를 부를 때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소절에 불편을 느껴, “하나님이 보우하사..”로 바꿔 부르는 성도들이 있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성경을 포함하여 ‘하느님’으로 표기된 글을 대할 때에는 즉각적으로 나와 다른 신앙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이라고 표기한 개정 한글판 성경이 출간되면서부터이다.
‘하늘님’의 의미를 유념하여 내포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보수적 교회에서는 이때부터 ‘하나님’의 유일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라는 숫자에 그를 높이는 ‘님’을 붙인 사실을 부각시키며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서구 신학은 초대교회 이후 지속적으로 인간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낼 수 있느냐는 논쟁이 지속되어왔다. 이는 창조주이시며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전제하지만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에게 어떤 의무가 주어졌는가를 규정하기 위한 토론이다.
그러나 샤마니즘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적 갈망은 서구신학의 고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칫 뜨거움이 인간의 행위를 극대화시킨 형태로 드러날 수 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그의 감동을 얻어내면 반드시 나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은 복음을 통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전혀 상관없는 종교적 신념이다.
신앙의 동기
한국교회의 특성인 뜨거운 신앙은 차거우거나 미지근한 신앙보다 훨씬 바람직하다. 최선을 다해 섬기는 성도들을 통해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했다.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매우 귀하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이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하고 있다고 믿는다.
단지 이 모든 뜨거운 신앙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동기를 긴히 살펴보아야 한다. 혹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이해와 그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대한 정당한 반응이 아닌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절대자를 대면하려는 한국적 신앙의 독특한 정서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성경은 열정으로 채워진 뜨거운 신앙행위 이전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먼저 점검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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