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을 파수하는 실천적, 논쟁적, 구원론적인 신학자
1)장로교에서 회중교회로의 변화
1644년, 그의 첫 목회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 마을이었다. 그는 얼마 후 에섹스에서 상업도시인 코게샬(coggeshall)로 사역지를 옮기며 그곳 출신의 메리 루크(Mary Rooke)와 결혼했다. 그는 1646년 주일에 출석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에게 교회관의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장로교 제도에서 온건한 회중교회주의자로 변환하였다.
2)반율법주의 논쟁
신학적 노선에 있어서 오웬과 당대의 청교도로 유명한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존 호른(John Horne)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코게샬(Coggeshall)에서 회중교회 목회를 하던 1648년,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게 되는 데 그의 저술이 상당히 반율법주의 경향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던 논쟁이 바로 반율법주의 논쟁이다. 이로 인해서 오웬은 “구원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다”(salus electorum, sanguis Jesu)는 글을 썼다.
장로교인에서 회중교회주의자로 변환, 리차드 백스터와 갈등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참여자 중 탁월, 사보이선언 서문작성
3)크롬웰의 군목과 옥스퍼드 부총장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이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을 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이런 설교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4년간 크롬웰과 함께 영국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크롬웰은 오웬을 데리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데리고 다니면서 군인들에게 설교를 하게하고 점령지의 종교적 상황을 판단하고 크롬웰의 정치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도록 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서 크롬웰에 의해 1651년 의회파가 승리한 후에 하원의 투표에 의해서 장로교회 지도자였던 레이놀즈 박사를 제치고 옥스퍼드 ‘그리스도의 교회’(Christ's church) 교수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오웬의 탁월한 행정력은 눈부신 업적을 남겨놓았으니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맡기고 경건과 신앙심의 고취는 물론, 일반 교육수준을 크게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인재들이 큰 감동을 받고 배출되었다.
그는 마침내 크롬웰의 궁중목사가 되었고 1652년 옥스퍼드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성직자 임명과정을 감독하는 감독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부총장이라는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오웬은 옥스퍼드 시절 여러 권의 설교집과 강의서, 논쟁서들, 주석, 교리연구서를 남겼는데 그의 저작이 지니는 가치와 중요성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지만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오웬이 옥스퍼드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대학의 행정자들을 지배하고 있던 대주교 윌리엄 로드(William Laud)가 로마가톨릭에서 내려온 온갖 미신적인 장식과 가톨릭적인 의식을 강요하며 온갖 장식을 고치고 새 동상을 세우자는 고압적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대주교 로드(William Laud)는 상하 구조의 국가체제를 따르는 ‘고교회’(High Church)주의자였다. 젊은 오웬은 가장 앞장서서 이러한 정치 목사의 행태에 비판을 가하고 강력히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한 나머지 학교의 설교목사직과 강사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청교도들은 ‘거룩한 특권’과 ‘고상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행동이라거나 마땅히 거부해야할 인간의 명령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해오고 있었다. 화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리들리(Ridley)와 라티머(Latimer)목사를 높이 추앙해왔던 터였다. 1657년에는 전제정치를 실현하려는 크롬웰의 욕망에 반대하여 오웬은 크롬웰과 결별한다.
5. 청교도 운동의 최전선에 우뚝 선 칼빈주의 신학자
1658년 오웬은 런던의 사보이 궁(Savoy Palace)에서의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윌리엄 그린 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으로 알려졌다.
청교도 신학의 절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인데 여기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오웬이었다. 1658년 사보이에서 독립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신앙고백서를 따로 작성하고 오웬이 서문을 썼다. 그러나 1660년 올리버 크롬웰의 죽음으로 인해 오웬의 생애는 급작스런 변화를 겪게 되는데 부총장의 자리는 다시 레이놀즈 박사로 교체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장로교회가 회중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하버드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이를 지적하면서 거부하였다. 오웬의 철저한 비타협적 자세와 다른 독립주의자들의 입장으로 인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대 영국에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던 인물들은 거의 다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장로교회 제도를 바꾸게 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장로교를 국교로 삼겠다고 약속했던 찰스는 오히려 청교도를 핍박하기에 이르면서 모든 상황들이 다르게 전개되었다.
오웬은 약 10년 동안 옥스퍼드 교수와 목사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1660년 3월 13일에는 감옥에 갇혀있던 존 번연 목사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한 일로 인하여 다시 한번 고향 스타드햄튼의 교회로 물러나게 된다. 1662년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으로 2000여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강단에서 추방되었을 때 오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후 핍박이 계속되는 동안 핍박에 굴하지 않고 오웬의 저항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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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