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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최용기 (1885-1957)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용기는 1885년 9월 14일에 한국 관동에서 태어났다. 관동이 태백 산지를 횡단하는 길목인 대관령의 동쪽 곧 오늘날의 영동지방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21세의 단신으로 그는 1905년 4월에 콥틱 기선에 의지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 인물 자료에 나오는 최용기가 있다. 그는 최용주라고도 불렸는데 1883년 4월 22일에 충청남도 서산군 이북면 관리에서 태어나 1904년에 하와이로 가서 1934년에 하와이 파이아텔에서 우편사서함 2호를 열고 사업을 하던 자동차, 건물, 곡류, 식료품 판매주식회사에서 근무했다. 관리가 관동으로 표기할 수 있고, 하와이에서 거주했다고 하므로 혹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는 마우이섬 파이아로 이동하여 이곳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파이아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1910년 3월에 존 T. 존즈 목사가 시무하던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제5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본 선교연회 고시위원회는 본 선교연회 기간에 있었던 지방 전도사 고시에서 최용기가 79점을 맞아 통과했음을 보고하였는데 그해 지방 전도사로 시험을 통과한 한인으로는 최용기 외에도 이선일, 조연택, 조한식, 박세환, 장용운, 김형, 임준호가 있었고, 일본인으로는 S토다도 있었다. 이로써 최용기가 하와이 선교사로서 첫 해를 맞았다. 특별히 이 해에는 하와이 선교연회에 참석한 교역자들이 와드만 감리사 부인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 소학교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기념 촬영을 하여 한인 교역자나 한인 교회로서는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방 전도사가 되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적어도 2, 3년 동안 권사로서 신실한 신앙행적과 교회 지도자의 자격을 인정받아야 했는데 그렇다면 1906년이나 1907년에 그가 권사로 파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용기의 하와이 선교사직은 2, 3년이 빠른 1906년이나 1907년부터 하와이 선교사로 활동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최용기가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던 1910년에 상당한 수의 한인들이 하와이 선교사로 있었다. 민찬호, 이경직, 홍치범, 김용S 집사 목사 곧 준회원으로서 정회원으로 가는 4년차 학습 기간에 있었고, 최진태와 김이제가 준회원 제3년차 학습 기간에 있었으며, 이선일, 조연택, 조한식이 지방 전도사 2년차 학습 기간에 있었다. 그해 선교연회에서 존 W. 와드만 감리사가 영어권, 일본어권 그리고 한국어권 총무를 선정할 때 위의 한인 교역자와 한인 교회를 총괄하기 위하여 홍치범이 작년에 이어 한인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위의 한인 교역자들은 통계부와 재정부뿐만 아니라 성경 및 쪽복음 위원회, 내지 선교 및 교회연장 위원회, 연회 관계위원회, 교육위원회, 주일학교 및 엡윗 청년부 위원회, 해외 선교위원회, 절제 위원회, 성수주일 위원회, 고시 위윈회 등 하와이 선교연회의 각 상설 위원회에 배치되어 위원회 활동에도 관여했다. 

지난해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와드만 감리사는 한국어를 구사하는 선교사는 시간을 내서 농장을 방문하여 하와이 각 섬에 흩어져 있는 수천 명의 한인을 돌봐주고 그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친해져서 시련과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인들이 원하는 도움을 찾아 해결해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910년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최용기를 어느 교회로 파송하였는 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으나 그가 마우이섬 파이아에 있는 농장에서 노동하였으므로 이곳 한인감리교회로 파송 받았을 것이다. 스프렉클스빌에 파송된 최진태 목사가 파이아까지 담당한 순회 목사로 보이는데 이듬해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통계에 파이아 한인감리교회 통계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듬해인 1911년에도 하와이 선교연회 목회자 명단에 최용기가 지방 전도사 과정 1년차에 있다고만 보고했을 뿐 그해 파송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으나 역시 위의 교회에서 사역했을 것이다. 

 

라나이 한인감리교회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뀐 24년이 지난 1935년 3월에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34회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최용기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이해에 최용기는 지난 해에 지방 전도사로 파송되었던 김종수 대신에 라나이섬의 라나이 한인감리교회에 설교 목사 겸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임준호 목사를 마우이섬 순행 선교사로 파송하여 라나이 한인감리교회를 치리하게 하였다. 

그해 한인 사역에는 여러 한인 선교사가 파송을 받았다. 이관묵은 하와이섬 순회선교사로, 현 순은 가와이섬 순회선교사로, 임두화는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이헨리는 오아후섬 와일누아 지역 기독교 교육 담당으로, 안창호(도산 안창호와 동명이인)는 오아후섬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홍한식은 오아후섬의 와이파후, 와일누아 그리고 가후구의 순회 선교사로, 정이조는 하와이 전역의 YMCA 한인 담당자로 그리고 전SW는 하와이섬 하갈라우 한인감리교회로 파송되었다. 

1년 후 1936년 2월에 모인 제39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10명의 어린이가 어린이 세례를 받았고, 2명이 다른 교회로 이명을 나갔으며, 등록한 성인 세례자는 99명이었으며, 등록한 어린이 세례자는 102명이었고, 거주하는 등록 회원은 42명인데 반해 비거주 등록 회원은 57명이었다. 웹웟 청년회 고등부에 62명이 등록하였고, 주일학교에는 4명의 교직원이 74명을 가르쳤다. 한 해 동안 교인이 헌금한 일반 헌금액은 73달러였고, 사례비로 300달러를 지급하였으며, 주일학교에 62달러를 지급했으며, 펜션과 구제 기금은 165달러였다. 그해 한 해 동안 하와이 선교연회가 373달러를 보조했으므로 교인이 1년간 헌금한 실제 헌금액은 227달러였다. 위의 통계는 1934년 3월에 모인 제29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통계와 비교하면 상당한 성장을 보여주었다. 그해 등록한 학습 교인은 10명이었고, 등록한 세례교인은 24명이었으며, 교회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44명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한인 노동자의 유입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1936년 2월에도 제31회 하와이 선교연회로부터 최용기는 라나이섬의 라나이 시티 한인감리교회에 설교 목사겸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1937년 2월에 모인 제32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21명이 학습 교인으로 등록하였고, 어린이 세례를 받고 입교한 56명이 등록하였으며, 25명이 세례 교인으로 등록하였고, 세례교인 3명이 라나이를 떠났으나 이명해 나가지 않았다. 주일학교에는 3명의 교직원이 있었고, 65명이 등록하였으나 주일에 평균 57명이 출석했고, 21명이 엡윗 청년회의 초/중등부에 등록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난 한 해 동안 5명의 교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헌금 내역에서는 단지 세계 봉사 헌금으로 5달러를 헌금했고, 펜선과 구제기금으로 10달러를 헌금했다고만 보고되어 있어 전체 헌금 내역을 볼 수 없다.

하와이 제일한인감리교회의 임두화 목사는 자주 자리를 같이하여 동역 목회자들과 유대를 강화했다. 1937년 2월에 본 교회로 점심 초대를 하였는데 라나이섬에 거주하던 최용기 외에도 임준호, 홍한식, 현 순, 안창호, 이관묵, 박종수, 정의조, 고덕화가 함께 했다. 

1937년 2월에도 최용기는 라나이섬의 라나이 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로서 파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2월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서에 따르면 이관묵 목사가 위의 교회에 파송되면서 2명이 지방 전도사로 파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관묵 목사의 파송으로 본 교회는 상당한 진보를 보았다. 1938년 2월에 있은 제33회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바로는 성인 세례교인수가 63명, 어린이 세례교인수가 66명이었고, 다른 교회로 이명간 자가 10명이나 되었으나 거주 세례 교인은 123명이었다. 주일학교 학생은 88명으로 매 주일 평균 65명이 출석하였는데 1년 동안 10달러를 지급했다. 엡윗 청년회 고등부에 59명이 등록하였으나 초/중등부에는 없었다. 1년간 교인들이 471달러를 헌금하여 165달러를 일반 재정으로 사용하였고, 목사 사례비로 250달러를 지급했으며, 세계 봉사비로 50달러를 지급했으며, 팬션과 구제기금으로 6달러를 지급했다.  

1938년 2월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연회에서도 이듬해 3월에 모인 하와이 선교연회 보고서에 따르면 라이나 한인감리교회에 2명의 지방 전도사가 사역한 것으로 보아 최용기가 지방 전도사로 파송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39년 3월에 보고된 하와이 선교연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어린이 세례를 받은 자가 5명이었고, 등록한 어린이 세례자는 62명이었으며, 등록한 거주 등록인이 118명이었고, 다른 교회로 이명 나간 교인이 7명이었고, 교회학교에 80명이 등록하였는데 이 중에서 매주 평균 56명이 출석하였고, 엡윗 청년회 고등부에 50명이 등록하였는데 초/중등부에는 등록한 학생이 없었다. 한 해 동안 주일학교에 17달러를 지급했고, 일반 재정으로 40달러를 소요했고, 세계 봉사 기금 등에 50달러를 상납했다. 한 해 동안 목사 사례비로 300달러를 지급했으며, 연금과 구제비로 6달러를 사용했다.

1940년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통계에 라이나 한인감리교회에 지방 전도사가 2명이나 파송되어 최용기가 1939년에 지방 전도사로 본 교회에 파송 받았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이런 추정은 1940년과 1941년과 1942년에도 2명이 파송되었으므로 최용기의 파송을 추정하게 된다. 

한편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하와이는 전쟁 지대로 변하여 계엄령하에 군정이 실시되었다. 일체의 자유가 통제된 가운데 한인은 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재산 동결과 행동 제한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라이나 한인감리교회의 활동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활동으로 한인이 적국인 대우로부터 해제되어 이듬해 연말부터는 신분을 보장받았으나 교회 활동에는 제한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43년 이후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한 통계가 수록되지 않았거나 보고한 통계가 있어도 지방 전도사 파송란이 없어 최용기의 지방 전도사 파송에 대한 추증조차 불가능하다. 최용기는 해방된 조국에서 6‧25전쟁 휴전 소식을 접한 지 4년이 되던 1957년 7월 12일에 향년 72세에 마우이섬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damien.sohn@gmail.com

03.2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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