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사병순은 1880년 5월 17일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남평안 대리회 장로 총대, 평양 서면의 증산반석 방에다리교회 장로와 남평안 노회서기를 역임하였다. 1913년 6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남평안노회가 그에게 목사안수를 주어 위의 교회 윌리암 L. 스왈론(소안론) 선교사의 동사목사로 그를 파송하였는데 총회전도국의 청원으로 남평안노회가 그를 중국선교사로 허락했다.
중국 선교사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교총회는 총회조직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해외선교를 결정하였고, 조선의 근간인 유교에 빚을 갚는다는 취지로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에 3명의 '선도사'를 파송한다. 총회는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3씨를 총회 앞에 일어서서 지면례를 거행하고 윤식명씨 기도로 동 3씨를 하나님과 그 말씀에게 부탁하다"라고 적었다. 사병순이 선교팀과 더불어 그해 11월에 래양에 도착하였다.
선교구역은 내양에서 동서남북으로 30리였고, 120여 촌에 인구가 많았다. 래양에는 장로교, 천주교, 침례교, 루터교에서 온 해외선교사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래양현 지사의 잔치 초대장에 김영훈이 답례로 보낸 한시로 70여 세의 노학자 장수명이 개종하는 쾌거에 힘입어 현지 중국인들은 한국 장로교회를 "신령한 교파로 인정하고 한국 선교사를 환영"하였다.
중국선교사로 시작해 상항 다뉴바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시무
하와이, 워싱턴, 유타 등서 사역하다 중국 거쳐 귀국 후 별세
사병순는 그의 선교팀과 함께 주일 강론회와 수요기도회를 개설하고, 필답과 전도지, 성경화본 및 칠판기를 사용하여 순회전도를 하였으며, 시장과 가정 그리고 노변에서 노방전도를 함으로써 유행전도를 했고, 사경회와 심방 등 좌당전도도 했다.
1915년 보고에 따르면 3명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고, 등록교인 40여 명 중 30여 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이들 중 군인 한 사람이 믿어 강서당에 밤마다 와서 예배를 드리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해 성탄절 헌금으로 도서 1상자를 구매하여 래양교도소에서 나누어주며 전도했다. 이듬해 세례교인 12명과 원입교인 30명 중 40여 명이 주일예배에 참석했고, 매 주일 8, 90전을 헌금하여 한 해 헌금액이 약 50원이었다. 그리고 문맹퇴치를 위한 '보통교육'도 실천했다.
총회전도국은 1916년 산동 선교부에 이일영과 심익현을 보내 시찰한 후 선교사 3인이 거주하던 집은 두 집에서 살림하게 하고 한 집을 더 마련하기로 한다. 그런데 박태로가 병이 중하여 그해 4월에 귀국 길에 올랐다. 이런 가운데 이듬해 1월 사병순은 평남노회에서 중화 기독교 산동노회로 이명하여 현지인 목회자와의 긴밀한 선교적 교제를 모색하였다. 이듬해 9월, 총회 보고에 따르면 많이 모이면 5, 60명, 적게 모이면 4, 50명이었고, 이중 세례교인이 28명, 학습교인은 35명이었으며, 새신자가 26명이었다. 2명의 집사를 세우고, 6곳에 기도처를 조직했는데 이중 3곳에 보통학교도 세웠다.
그런데 사병순은 김영훈과 함께 1917년 4월에 선교지를 이탈한다. 선교활동 3년5개월만이다. 그러나 총회는 이들에게 "위로하는 문안과 이후에도 주의 일을 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편지하기로" 가결했다. 그런데 김영훈이 1927년에 ‘기독신보’에 기고한 회고담에서 무단이탈은 선교가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총회전도국이 제반시설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빈약한 가운데서 최선을 다했고 선교목적을 완수했으며 선교토대 또한 구축했음을 확신했다.
다뉴바 한인교회 목사
중국 선교지를 이탈한 지 3개월 후인 1917년 7월 20일에 사병순은 김영훈과 함께 '차이나'호를 타고 상항에 도착한다. 그달에 상항한인교회 이대위 목사는 환영회를 열어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해 10월 사병순이 병이 들었는데 가옥채 보상기부금으로 6달러를 기증하니 이를 민망히 여겨 참기를 권한 사람에게 정색하여 "나는 이 짐을 풀어놓음으로 병중의 내 마음이 위로가 되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희생정신은 이뿐이 아니었다. 중가주 다뉴바와 오하이오 주 아크론과 중가주 삭도 등 먼 거리를 이주하면서도 이경의와 김석길의 병원비를 기부했고, 맨티카한인감리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5달러를 헌금했다.
이듬해 9월 12일에 사병순이 제1차 세계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그는 1년 전에 두 다리가 부러졌다고 보고하면서 현재 중가주 다뉴바한인교회 목사라고 적었다. 이 서류에서 사수은이 그의 친척임을 알게 된다.
코스모폴리스 한인교회 목사
워싱턴주 코스모폴리스의 소밀공장에 취직한 한인동포가 약 30명이었다. 이중 다수가 기도회를 열기로 하여 1919년에 사병순이 이곳에 한인교회를 세웠다. 그해 7월 김춘학의 부인이 재수술을 받았으니 사병순의 방문이 필요했다. 그해 10월 국민회 지방회가 조직될 때 그는 학무와 대의원에 선임되었는데 회장 김 탁, 부회장 박제목, 총무 김병학, 서기 정기헌, 재무 김병모, 법무 이정실, 구제 김일만 등이 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해 8월에는 한인들이 근면하다는 평가에 노동 주선인 박제목이 "몇백명이라도 오시오"라고 크게 광고하였는데 3개월 후 일본을 배격하는 운동이 극렬하여 한인동포도 곤경에 빠져 이동하는 바람에 교회가 문을 닫았으니 사병순의 실망은 컸다. 그는 2년 전 안착한 상항으로 되돌아갔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박내선, 백락현, 송경신, 김성기, 윤계상 등 이승만을 따르던 하와이한인감리교회 교인 30여 명이 1916년에 박내선의 가정에 모여 예배를 시작했다. 이듬해 7, 80여 명이 모여 푸우누이에 있는 한인 여학원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신립교회’라고 불렀다. 1918년 말에 어른 230명과 아동 165명이 모였고, 호놀룰루 이외에 와히아와, 하와이, 카우아이 등에도 예배처를 마련했다. 그해 12월 여러 곳에 있던 예배처의 대표 14명이 모여 교회 이름을 한인기독교회로 바꾸고, 사병준을 호놀룰루한인기독교회의 목사로 청빙했다. 그가 1919년 호놀룰루 전화번호부의 Sa Pyung Choon이다. 그는 민찬호가 부임하던 1919년 10월 이전까지 약10개월 시무하였다. 하와이 한인이민사가 이덕희 선생이 하와이 노동 이주민 명단에 이 이름이 없다고 하니. 그가 사병순 Sah Pyung Soon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는 청빙은 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연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다뉴바한인장로교회 목사
1920년 8월 15일에 다뉴바 한인 기도처가 150명의 교인이 모여 6명의 장로와 6명의 안수집사를 선출하고 미국 최초의 한인장로교회로 조직된다. 사병순은 1921년에 부임했으니 두 번째 부임이다. 그해 10월 단군 성탄 기념식에서 그가 기도하였다니 오늘날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어렵다. 그해 3월 이성환이 자동차 사고로 별세하여 조문객은 아들 하나 의지하고 살던 본국의 노모를 생각하며 참담한 정을 금치 못했을 때나, 그해가 저무는 12월에 김종혁의 부인이 별세하였을 때도 사병순이 함께 했을 것이다.
한국학교는 사병순에게 역점사역이었고, 교장이면서도 '대한역사'를 가르쳤다. 그해 여름학기에 등록한 학생은 남녀 43명이었고, 임시 교감에 홍치범, 교사는 최능익과 김덕세였다. 1923년 5월 3일자 신한민보는 그의 열심 전도로 매우 은혜가 있었다고 보도한다. 사병순에 따르면 한인들이 사업상 기회를 찾아 이동하여 5, 60명이 주일예배에 출석하였는데 이중에 3, 40명이 어린이였으니 그의 사역이 주일학교가 중심이 된 듯하다. 주일학교 교장은 최능익이었고, 송매리는 20여 명의 유치반을 가르쳤다. 사병순은 송매리가 현재에만 재미로울 뿐 아니라 장래에도 복된 소망을 성취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해 봄 다뉴바에 홍역이 유행하였을 때 그가 고통받던 자녀를 찾아가 위로하고 기도하였겠다. 그해 7월에는 와스코에서 이무경과 박화준이 탄 자동차가 기차와의 충돌사고로 그들의 장례식을 눈물로 집례한 후 베이커스필드 공동매장지에 안장하였다.
평남 강서군에 거주하던 사병순의 부인 송수은이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 단원으로서 군자금 모금과 배일선전 및 불온문서 배포혐의로 1921년에 일경에 체포됐다는 소식이 그해 11월 10일자 신한민보에 게재됐다. 모진 고문을 받은 송 사모가 출옥직후 세상을 떠났고, 9세 딸 사인애는 고아가 되었으니 사병순의 마음이 산산조각이 났으리라.
유타주 빙햄
사병순은 유타주 빙햄 캐년으로 이주한다. 1924년 7월의 신한민보가 병원비 기부자 명단에서 그를 목사라고 소개했으므로 늦어도 1924년에 이곳에 이주하여 귀국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탄광에서 철도보선공으로 일하면서 자비량으로 교회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탄광촌으로 적을 때는 3, 40명, 많을 때는 60명 이상의 한인이 거주했고, 자녀를 둔 가정도 있었다. 그는 이곳의 백인 빙햄캐년감리교회를 빌려 예배와 주일학교와 한국학교를 하고, 음악대를 조직했을 것이다.
1926년 임한규가 박성근을 권총으로 살인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병순이 장례식을 인도한 후 임한규를 심방하였고, 1929년 안전사고를 당한 이기열과 조문해를 위로하였고, 노동이민의 삶을 포기하고 자살한 이선범의 장례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한인 40여 명과 내빈 20여 명이 모인 1930년 삼일절 기념식에서 개회한 직후 애국가를 합창한 후 사병순이 기도하였다. 이날 학생후원금으로 그가 7달러를 기부했는데 거금이었다.
사병순의 목회는 나성으로 이주하던 1932년까지 8년간이다. 그해 11월 17일 그는 상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중국 텐진한인교회
한국으로 귀국했다는 사병순이 1935년에 중국 텐진에 거주하고 있었다. 1937년 1월 19일자 기독신보는 “주야로 열심히 전도하던 김성수씨는 임기가 돼 귀국해 (현지에) 머물던 전 조선장로회 목사 사병순씨가 예배를 인도하시며 수고하였다”고 보도한다. 텐진은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탔던 미국 상선 제너랄 셔만호가 정박한 곳이다.
그 후 한국으로 귀국한 사병순은 1944년 8월 9일 외동딸 사인애가 살던 강원도 철원에서 향년 64세로 소천하여 중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외손자 김희준에 따르면 강원도 금화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 풀려나 한 달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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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