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사역은 윗마을 탈출사역이 아닌, 윗마을로 다시 돌아가는 분들에게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분들을 도우면서 사랑으로 질병이 치료되고 복음으로 영이 거듭나기를 소망했습니다. 윗마을 분들은 얼마나 사랑이 갈급한지 반창고만 붙여주어도 암이 치료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중국인이나 조선족분들 사역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윗마을 사역만 하겠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조선족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청년을 만났습니다. 좋은 옷과 핸드백, 폰을 들고 철없이 놀기에, 부모님 고생을 알려줘야겠다는 마음에 불러서 밥을 사주면서 “부모님이 한국에서 어떤 고생하는지 그 삶을 아느냐? 어머니 생각해서 검소하게 살아라!”고 조언했습니다.
대부분 조선족 청소년들은 10년 이상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서 부모님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고 부모님은 돈이 들어오는 통로 정도로 여기곤 했습니다. 물질로 어린 시절 받지 못한 마음의 공허를 채우는 것이 안쓰러워서 말을 건넨 것인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그들이 자주 저희 집에 놀러왔습니다.
어느 날 “삼촌, 숙모! 저희 며칠 자고 가도 되요?”하는 것입니다. 조선족 사역을 애써 외면하던 터라 마지못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윗마을 꽃제비라는 소식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걷던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며칠 지났을까, 어느 날 밤 “삼촌 숙모! 할 말이 있어요. 시간되세요?”하기에 그 날 새벽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들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고, 돕는 분을 만나서 지금은 함께 살고 있다고 속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줄 알았는데 그랬구나” 마음이 미안해졌습니다.
“삼촌, 저희 곧 다른 도시로 이사 가요! 삼촌과 숙모가 보고 싶을 거예요!” “그래? 아쉽다. 하지만 어디로 가든지 너희가 잘 살기를 응원할게! 용기 내렴!” “네~에!... 그런데 삼촌... 아니예요~!”
그렇게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어딘지 어둡고 아쉬운 눈빛과 몸짓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소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사 전에 인사 온다더니, 그냥 떠났나?’ 왠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잘 살겠지 생각하며 그렇게 잊으려는데 문자 하나가 왔습니다.
“삼촌, 저희 조선족 청소년 아니에요! 윗마을에서 왔어요! 저희가 만난 사람 중에 삼촌과 숙모가 제일 좋아요~! 저희는 다른 나라로 가요~!”
예상치 못한 윗마을 꽃제비라는 소식에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걷던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던 그 입술과 눈빛, 그 밤이 아무리 깊어져도 밝아지지 않던 그 얼굴색이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왜 그때 다그쳐 묻지 못했을까! 그랬더라면 이들을 이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제 자신이 한스러웠습니다. 하나님께도 원망했습니다. 제가 찾던 아이들이었는데 왜 이제야 알게 하시냐고, 설마 하나님이 이렇게 저에게 꽃과 제비들을 보내셨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요.
어디로, 무슨 이유로, 누구의 도움으로 떠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아내와 함께 눈물 흘리면서, 우리가 찾던 아이들인데 눈치 없어서 잘해주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08.2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