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선교를 하는 이영희 목사가 최근에 보내온 교도소 선교 당위성에 대한 글을 수회에 걸쳐 연재한다.
가난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나의 부모님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쌀이 부족한 날이 많아서 나는 집에 있는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서 가족들을 먹여야 했다. 돈이 없어서 먹을 것조차 살 수 없는 상황, 매달 내야 할 공과금이 없어서 마음을 조려야 하는 상황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과정이 나에게 준 선물이 있다.
나는 가난이 무엇인지를 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헤아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절대로 가난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돈을 움켜쥐고 있으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삶을 통해 나의 경험에 근거한 신념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더 크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자기중심적인 계획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미국에서의 시작
나는 한국에서 미군이었던 키스(Keith)와 결혼을 한 후 1979년 그와 함께 미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오레곤 주 포트랜드 시에 있는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함께 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남편은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나는 그가 진로를 바꾸기를 원했다. 그가 목회자로 헌신한다면 우리 가족은 가난하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히려 내 마음을 바꿔주셨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내게 말씀해주신 것이다. 그 후 돈을 충분히 벌어야 한다는 내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남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런 그를 더 이상 그 길로 가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
1987년, 남편은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아릴맆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몬테나 주에 작은 마을에 있는 플레인스교회와 파라다이스연합감리교회에 임명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둘 다 어릴 때였다.
그가 목사가 된 후 우리 가정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나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어서 목사되는 것을 반대했던 터라 남편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내가 컴퓨터에 관련된 일자리를 찾아서 빚 없이 살 수가 있게 되었다.
남편이 목사였기 때문에 내가 사역을 하겠다고 하면
남편이 기꺼이 지원해 주리라는 기대를 했다....
부르심
“모든 사람들이 다 나 같다면, 세상에 목사는 단 한사람도 없을 거에요”라는 말을 나는 목사인 남편의 친구들에게 하곤 했었다. 그만큼 나는 목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마음에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역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씀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묵상집, “예수님과 걷는 길”을 쓰면서 나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상처 받은 사람들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를 내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나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수없이 갈등한 끝에 사역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였다.
포기하지 않음
나는 남편이 목사였기 때문에 내가 사역을 하겠다고 하면 남편이 기꺼이 지원해 주리라는 기대를 했다. 실제로 남편이 신학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나는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가며 그의 학업에 필요한 뒷바라지를 했다. 그때까지 남편도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밀어주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역을 하겠다는 나의 결정에 대해 남편이 반대를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사역자가 되기로 결심했다며, 아일맆 신학대학원에 가서 목회학석사과정을 밟겠다고 하자 그는 내게 미쳤다고 했다.
그리고 학교 근처로 이사할 생각이 없으니 통학을 하라고 했다. 그때 당시, 우리는 몬테나 주에 글래스고에 살고 있었는데 콜로라도 주 덴버에 있는 아일맆신학교까지의 거리는 편도로 약 1330킬로미터(750마일)였다. 남편은 사역의 길을 가겠다는 나의 의지를 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르심에 순종하겠다고 이미 하나님께 말씀을 드린 상태였다. 그의 태도는 실망스러웠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키스는 그 해에 와이오밍주 버펄로에 있는 두 교회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 해 가을 나는 그곳에서 덴버에 위치한 아일맆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편도로 약 700킬로미터(430마일)가 되는 거리를 3년간 운전하며 학교를 다녔다. 와이오밍에 겨울폭풍이 불던 어느 날, 살얼음판에서 자동차 사고가 나서 나는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했다. 하지만 내 차는 폐차 처분을 해야 했다.
yonghui.mcdonald@gmail.com
05.0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