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의생애와 작품들 (1)

I. 존 오웬의 생애

 

1. 존 오웬의 배경

 

'마지막 청교도의 신학자'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우는 존 오웬은 웨일즈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교도 운동의 중반기(청교도 3세대)로 접어든 1616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북쪽으로 약 km 떨어진 스타드햄(Stadham)의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청교도 목사인 헨리 오웬(Henry Owe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엔의 할아버지 때부터 그들은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웨일즈 지방의 청교도들이었다. 

외가(外家) 쪽 할아버지 루이스 오웬은 웨일즈의 귀족으로, 북 웨일즈 메리오넷 지방의 대법관과 부장관으로서 중요한 일을 국왕과 상의하는 위치에 있었다. 할아버지 험프리 오웬은 루이스 오웬의 손녀 수잔과 결혼하여 열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가장 막내였던 헨리 오웬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였다. 

헨리 오웬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언어, 철학, 신학을 공부한 후 옥스퍼드셔 지방의 스타드햄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는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기던 중 막내 오웬을 낳아서 교회에 바쳤다. 존 오웬은 세 명의 형제들과 한 명의 누이와 함께 성장하였다. 오웬의 유년기는 성실하고 능력 있게 목회를 하던 경건한 청교도 목사인 아버지 헨리 오웬과 어머니의 관심과 돌봄 속에서 신앙적인 훈련과 교양적인 훈련을 충분하게 받는 시기였다.

 

2. 존 오웬의 학문의 기반

 

옥스퍼드 출신의 목회자이며 탁월한 신학자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둔 가문에서 자란 존 오웬은 명석하고 천재성의 비범함을 보였는데, 그는 12살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여 10년간 공부했다. 그는 학자의 기질이 있어 밤에 4시간의 수면만 취하며 학문적 탐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종종 여가를 즐기기도 하였는데, 투창 경기를 즐겼으며 롱 점프 선수였고, 풀룻을 불었다. 웨일즈의 청교도 가문의 영향을 받아 하루 네 시간 만 잠을 자면서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여서 훗날 건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성경 언어(히브리어, 헬라어는 물론)를 망라하여 라틴어와 고전어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학사와 석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많은 독서와 탐구 능력을 길렀다. 그는 청교도 정신을 물려받아 고상한 학문과 청결한 양심의 가정과 학교에서 양육 받았다. 

이런 청교도 집안의 3대에 걸친 기도와 학문의 밑거름이 청교도 신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기여한 많은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는 곧바로 학위를 받은 후 대학의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대학에 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2년 선배인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를 만났으며, 이 두 사람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 리차드 십스(Richard Sibbs, 1577-1635)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훗날 절친한 동료가 된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1600-1679)과 함께 오웬은 옥스퍼드대학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 학위를 수여 받았다.

 

 

웨일즈 청교도 명문집안에서 출생,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의
영국 방문 중 한 교회에서 무명 목사 설교 듣고 구원 확신

 

3. 영적 변화의 전환점

 

그는 정치에 있어서는 의회당 지지자였다. 그가 학문을 하는 동안 아버지가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삼촌의 도움을 받았는데 삼촌은 왕당파를 지지하였으므로,결국 둘은 결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오웬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런던으로 돌아오는 오웬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을 예비해두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오웬의 영적 체험과 성숙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시절부터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근심해오던 것이 있었다.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변화 없이 그대로였다. 물론 그는 이미 신학적 지식을 많이 갖춘 실력 있고 확신에 찬 칼빈주의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변화는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당시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성 미가엘교회(St. Michael Church)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였다. 

그날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에서 올라온 무명의 목사가 설교를 대신하여 실망하게 되었다. 오웬의 친구는 다른 유명한 설교자가 설교하는 교회로 빨리 가자고 말했지만 지칠 대로 지쳐있던 그는 그냥 자리에 앉아서 설교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날의 설교는 마치 오웬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손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의 영적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 무명의 설교자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거늘”(마8:26)이란 본문으로 설교하는 동안 하나님은 이 방문 목사를 통해 그의 심령에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런던에 돌아온 이후 그는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 속에서 이전보다 더 격렬한 영적인 씨름을 하게 되었고 그에게 얼마나 깊이 영적 각성이 일어났던지 약 3개월간 다른 사람과 교제나 대화하기도 힘든 상황이 될 만큼 극적인 체험이었다.

younsuklee@hotmail.com

01.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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