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물을 틀었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지를 않았다. 물이 데워지는데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가 싶어서 오래 기다렸지만 여전히 미지근한 물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부터 뜨거운 물이 시원치 않게 나온 것 같았다. 온수기에 가보니 내부에서 무엇이 깨졌는지 밑받침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차고 바닥에도 물이 흘러 있었다. 대강 물을 닦아내고 핸디맨 아저씨에게 연락했지만 바빠서 다음 날 늦은 오후에나 올 수 있다고 했다. 급한 대로 큰 냄비에 물을 끓여서 머리를 감았다. 어린 시절 머리를 감으려면 엄마가 물을 데워주던 생각이 났다. 요즈음 아이들은 수도꼭지에서 바로 나오는 온수가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선교지를 방문할 때에나 경험할 듯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서민들이 뜨거운 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70년대 초반 즈음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하려면 목욕탕에 가거나 집에서 뜨겁게 끓인 물에 찬 물을 섞어서 물을 아껴가며 씻어야 했다. 거의 오십 년 만에 물을 끓여서 머리를 감으려니 나름대로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했다.
다음 날 늦은 오후에 핸디맨 아저씨가 왔다. 어차피 새로운 온수기로 바꿀 상황이니 보기에도 부담되는 큰 물탱크가 아닌 tankless 온수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아저씨가 여러 번 tankless 온수기를 설치해보았다고 하기에 걱정 없이 일을 맡겼다. 그런데 늦은 밤까지 다섯 시간 넘게 걸려서 새 온수기로 바꾸었지만 작동이 되는지 켜보니 자꾸만 error 사인이 나왔다. 다른 전문가를 부르기도 그렇고 답답해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결국은 그 다음날 아침에 다시 새 부품을 사용한 후에야 온수기가 작동되었다. 안도의 마음과 함께 뜨거운 물 없이 꼬박 이틀을 보내면서 일상의 삶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감사를 드렸다. 더운 물을 틀면 당연하게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온수기가 고장이 나보니 뜨거운 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이다. 또 비록 온수기는 고장 났지만 개스가 있어서 물을 데워 적당히 씻을 수 있던 것도 감사했다.
올해도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 돌아보니 올해는 친구의 죽음, 딸의 수술, 올케 언니의 죽음 등으로 마음이 유난히도 어려웠던 한 해였다. 그러나 탄식과 슬픔, 안타까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바짝 붙어 계시면서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격려도 하시고, 믿음에 대한 도전도 하셨음을 고백한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단 며칠이라도 쉴 수 있는 환경을 주셨던 것도 감사한다. 감사는 주의 자녀들이 주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할 때 나오는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 그리고 반복되는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신실하신 주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이 감사일 것이다. 그렇지만 민수기를 읽다보면 애굽 땅을 벗어난 이후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면 물을 주시고, 매일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로 먹이시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면 메추라기를 보내시는 하나님을 향해 계속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참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모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알던 날부터 이스라엘이 항상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말을 했을까?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도 잊어버리는 백성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에게 내가 살아왔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날마다 고백하고 찬양하는 태도가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은혜를 주제로 한 많은 복음 성가 중에 “은혜”라는 곡이 있다. 평소에 당연하게 누렸던 일들이 돌아보면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가사이다. 그 곡의 가사처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음을 인하여 마음 깊이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감사하는 계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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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