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의 “고백록”(1)

들어가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시점에선가 한 번은 인생을 돌이켜보며 참회(懺悔)하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은 그동안 자신을 사로 잡아왔던 주변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하지 않고 가장 처절한 자기 성찰의 시간외 될 것이다. 물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과정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고백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는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책을 쓰도록 감동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회개 기도를 통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독자들에게 알려 그들도 하나님을 알게 하자는 그의 의도대로 고백록은 철학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던 많은 지성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오랜 세월 진리를 찾아 방황하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육체적인 정욕을 이기지 못해 고민하던 사람들도 이 책을 통해 위로를 받고 또한 정욕을 이길 구체적인 방법을 인지하게 되었다. 

기독교 역사상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고전 가운데 한 권으로 꼽히는 책이기에 우리는 이 책의 내용과 깊이에 익숙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통해 깊은 회개의 체험을 할 수 있다면 가장 귀한 가치 있는 책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354-430)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교부, 철학자, 신학자, 감독, 역사가, 수사학자, 교회치리자의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중세뿐 아니라, 종교개혁, 그리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에 걸쳐 계속해서 영향을 끼쳐온 사람이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서들은 117권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은총론을 중심으로 한 ‘펠라기우스주의 반박론’,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한 ‘아리우스주의 반박론’, 신흥세력으로 부각되던 이교주의자들에 대한 논박인 ‘신이교주의 반박론’, 신앙핸드북 등은 기독교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독교 사상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 책들을 읽어보면 신앙의 본질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고백록’은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이다. 

틸리히(P. Tillich)는 “그는 자신  이후 천년 동안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윌리암스(D. Williams)는 “서양 신학사는 어거스틴에 대한 계속적인 주(註)밖에 안된다”라고 평가할 정도다. 어거스틴이 끼친 불가피한 시대적인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가 끼친 공로와 선한 영향들 중의 하나인 고백록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어거스틴(Augustine, AD 354- 430)의 생애

  

어거스틴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그의 저서인 ‘고백록’(Confessions)과 제자 포시디우스가 쓴 전기를 통해 자세히 알려져 있다. 어거스틴이 72세에 쓴 자전적 평가이며 많은 작품에 대한 요약인 ‘성찰록’(Retractions)에서도 그의 삶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이교도였으나, 신실한 기독교신자인 아내 모니카의 영향을 받아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성공과 출세를 위해 어거스틴을 교육시켰다.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했지만 370년 고향 유지의 도움을 받아 고향을 떠나 로마, 카르타고 등지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그런 가운데 카르타고에서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글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재산이나 명성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철학에 매료된 그에게 기독교신앙은 ‘문화인’이 받아들이기에는 비철학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전체 기독교에 남긴 어거스틴의 공적과 공헌은 가히 기념비적

‘고백록’ 통해 깊은 회개의 체험할 수 있다면 가장 가치 있어

 

그래서 우연히 마니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원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게 하는 마니교에 쉽게 빠져 들었다. 하지만 마니교에 대한 열정도 그에게 오래 가지 않았다. 그가 품고 있었던 ‘세상에 가득한 악’에 대한 의문에 대해 대답을 주기에는 마니교의 이론적 체계가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니교를 떠나게 되고, 28세가 되던 해에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밀라노로 간다. 그 이듬해 그는 당시 밀라노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성직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감독을 만난다. 그의 설교를 듣게 된 어거스틴은 그의 지혜와 지식에 몰입하게 되었고, 점차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암브로시우스에게 빠져든 그는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던 “악”에 대한 의문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 저작들을 읽으며 기독교 사상에 대해 점차 깊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밀라노의 정원을 거닐던 그는 아이들이 정원에서 놀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 그 목소리에 이끌려 그는 가까이 있던 성서를 들고 읽었다. 그 때 펼쳐진 성경은 바로 로마서 13장 13-14절이었다. 

“그 말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반복되었던 말은 ‘그것을 집어 들고 읽어라, 그것을 집어 들고 읽어라’라는 후렴처럼 반복되는 노래였습니다. 나는 곧 눈물을 그치고 안색을 고치어 어린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할 때 저런 노래를 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에 그런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성경을 펴서 첫 눈에 들어온 곳을 읽어 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그는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드디어 32세에 신앙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43세에 집필을 시작하여 46세에 집필을 완료한(AD 397-401) 그의 책이 고백록이다.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기도하고 사색하는 공동체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391년 봄, 카르타고 다음가는 도시인 힙포교회의 간청으로 힙포교회의 감독이 되고 그로부터 4년 뒤 주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76세로 삶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철학, 신학, 그리고 논문과 같은 무게를 가진 218통의 편지, 500권 이상의 설교집을 남겼다. 

“어거스틴 이전까지의 모든 신학과 사상이 어거스틴에게 흘러 들어왔으며 어거스틴을 통해 후대로 흘러 나갔다”라는 표현이 생겨날 정도로 전체 기독교에 남긴 그의 공적과 공헌은 가히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younsuklee@hotmail.com

02.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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