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이 친밀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마 7:9,10) 부모는 악하여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주려한다. 문제는 좋은 것을 받는 자식의 상태이다. 그냥 좋은 것을 주면 귀한 줄을 모른다. 그리고 자식이 가지고 누리기도 전에 이웃과 사탄이 먼저 알고 빼앗아간다. 성경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다.”(마7:6) 그들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그것을 찢어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것을 알아보고 그것을 귀하게 사용하게 된다.
1. 좋은 사람이란 ‘깨어진 질그릇’이 되는 것이다. (7절)
질그릇은 깨어지기 쉬운 천한 그릇을 말한다. 질그릇 같은 마음이란 연약함과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만일 깨어지지 않는 그릇 속에 보호배를 넣어두면 꺼내 쓸 수가 없다. 이는 물건을 자물쇠로 잠가놓고 열쇠를 잃은 경우와 같다. 주님의 방법은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과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귀한 보배 그릇이 되길 원한다. 보배그릇이 되어야 보배를 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질그릇이 되어야 보배를 담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럼, 질그릇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존심이 상한 사람(a person with hurt pride)’이다. 자기의 힘으로 무엇을 하다가 큰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다. 모세는 어떻게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는가? 그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다가 이집트 청년을 살해하여 죄인으로 몰려 광야로 도망친 깨어진 그릇이었다. 요셉은 어떻게 중동의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는 총리가 될 수 있었는가?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려가 종살이하며, 또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내려가는 사건으로 부푼 꿈이 깨어진 질그릇이 되었다. 그들은 세상은 자기의 힘과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가 꺽이면서 질그릇이 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 된 우리가 질그릇이 되기까지 기다리신다. 그런데 다윗은 일찍부터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했다.(시 51:17) 그는 어린 나이에 원수 골리앗과 싸울 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담은 질그릇으로 싸웠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골리앗은 강력한 군인이었으므로 자신의 칼과 창을 의지했다. 그러나 다윗은 어리고 약했으므로 자신의 힘이 아닌 ‘상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의지하게 되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온 백성 지으신 만 왕이시니 그 자비 영원히 변함없어라.” (찬67/4절)
2. 질그릇이 되려면 도가니에서 7번 구워져야 한다. (8,9절)
한 번만 상처를 입어도 자기 계획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 1등 하다 2등을 하면 자살을 시도하는 아이도 있다. 생각대로 안되면 기도를 중단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시험에 떨어지고 직장을 잃으면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졌다고 집 밖을 나오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인생을 보면 실패의 연속이었다. 사립초등학교 들어가려고 제비를 뽑았는데 떨어져, 한 해 재수하여 공립초등학교에 갔다. 일류 고등학교에 들어가려고 시험을 쳤는데 떨어져 후기로 들어갔다. 대학교 시험도 떨어져 지방대학에 머물렀다. 신학교 시험도 떨어져 재수하여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했다. 장로교 통합측 최초의 베트남선교사로 지원해 한국의 언더우드 선교사처럼 멋지게 선교하고 싶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몰아 베트남을 떠나게 했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하나님이 나를 불가마니 속에 집어넣어 7번 단련한 순전한 질그릇을 만들고 계셨다. 실패를 통해 배울 때 가장 많이 배운다. 지난 4월초에 캐나다 토론토 북쪽 지역의 기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았다. 태풍과 얼음비(freezing rain)로 소나무들이 다 꺽이고 부러지고 지붕을 훼손하고 건물 주위의 화단을 어지럽히며 가지들이 흩어져 전쟁터를 방불하게 되었다. 아름다웠던 기도원이 흉가처럼 변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소나무들이 위로 새순을 내면서 야생마처럼 힘차게 위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비둘기처럼 온유한 모습이 독수럼처럼 강인한 생명력이 넘치는 나무로 변해가고 있었다. 재난은 심판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생명력이 넘치는 활기찬 기도원의 모습으로 변화를 만들어내었다. 어떤 광물도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욥이 고난을 받지 않았다면 욥의 친구들처럼 율법적이요 논리적이요 이성적인 틀 안에서 고난받는 자들을 인과응보의 법칙인 원인과 결과로만 인생의 문제를 풀었을 것이다. 그들은 욥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고 그가 받는 고난을 죄의 원인으로 분석하며 해결책으로 회개만 강요하게 되었다. 고난과 심판은 끝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더 크신 하나님의 계획이 심판과 죽음 이면에 설계되어 있었다.
3. 질그릇의 가치는 담고 있는 내용물에 달려있다.
사과를 담고 있으면 사과그릇이 되고, 밥을 담고 있으면 밥그릇이 되고, 술을 담고 있으면 술잔이 된다. 그릇보다 담겨 있는 내용물이 중요하다. 사람의 겉모양보다 속에서 나오는 말이 더 중요한 것과 같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 위의 금 사과니라.”(잠25:11) 우리 속담에 “소문난 잔치는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화려한 혼인잔치는 금 그릇 위에 담긴 돌 사과에 불과하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바울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담고 살았다.(10절) 젊은 시절 바울은 자기가 금 그릇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 시시한 것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질그릇이 되고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십자가가 멸망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후 바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만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7,8) 그러자 그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상처입은 자들의 위로자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방인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역사를 일어키게 되었다. 그는 날마다 죽는 편을 선택했다.(11절) 그러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이 그의 죽을 육체 속에 계속 나타나게 되었다. 항상 주님을 담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다른 생각이 몸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나님의 방패를 사용해보라. 고난만 보지말고 고난의 껍질에 싸여 있는 예수님의 인격을 담아보라. 고난은 우리를 깨뜨려 질그릇으로 만드는 참 좋은 도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의 껍질 안에 담겨있는 더 좋은 것을 주길 원하신다. 내가 깨끗하게 준비된 질그릇이 되면 주님은 넘치는 열매와 축복을 부어줄 것이다. 이것이 상한 마음 속에 담긴 보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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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2.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