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 월에 학교로부터 내가 담당하던 프로그램을 닫기로 결정해서 교수직 연장을 안 해준다는 통보를 받았고 이번 8월 말로 학교 교수직이 끝났다. 오랜 교수생활에서 이사해야 할 짐으로 남은 것은 책과 강의노트다. 친구 교수는 은퇴하면서 다 버렸다는데 이십 년 넘게 가르치며 준비해 온 강의 노트를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책들은 그런대로 책장 앞에 쌓아 놓았다. 강의 노트는 일단 차고에 내려 놓았지만 정리해서 방으로 옮겨가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 더 귀찮아 질 것 같아서 강의 노트가 들어갈 자리를 만드느라 방정리를 시작했다. 우선 책상 옆 구석에 잔뜩 쌓아 놓은 자료들과 책들부터 치우기로 했다. 제일 위에 자리한 큰 박스를 열어보니 삼십 년도 더 지난 남편의 일기가 나왔다. 암이라는 판정을 받은 후에 쓴 하나님을 향한 간구와 애원, 탄식 그리고 믿음의 고백이 구구절절이 담겨 있었다. 또한 남편이 아플 때 많은 분들이 보내 준 격려의 편지와 카드, 장례식과 그 이후 보낸 조문 카드들도 가득했다. 수 많은 분들의 위로와 격려의 글들이었다.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 분들이 전하고자 했던 한결 같은 메세지는 “힘내세요.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일이 갑자기 엊그제 일 같이 다가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그 암담했던 시간을 헤쳐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워서 아침 내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찬송이 나왔다.
그 다음 박스에는 81년 미국에 온 후로 받은 편지와 카드 중에 소중하다고 생각되어서 모아 놓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미국 시골 교회로 이민 목회 초청을 받아 왔을 때 내 나이는 24살 이었다. 어린 나이에 듣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힘들었지만 부모, 형제,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참는 것이 더 어려웠다. 남편은 교회 일로 정신없이 바빴고 첫 아기의 출산을 몇 달 앞둔 나는 일상을 나눌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혹시라도 한국에서 편지가 올까 싶어서 매일 우체부가 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 당시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던 한국에서 온 언니들, 부모님, 친구들의 편지들을 하나씩 꺼내 읽으니 사십 년 전 외로웠던 초기 미국생활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그때에도 하나님은 곁에 정이 많은 국제 결혼한 분들을 붙여 주셨다. 산후 조리하라고 큰 들통 하나 가득 미역국을 끓여다 주었던 분은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남편이 떠난 후 생활이 빠듯할 때 매 달 물질적인 후원을 하던 옛 교회 권사님의 격려의 편지, 우리 교회 성도도 아니었는데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점심 값을 하라고 꾸준하게 도와 주신 권사님이 수표와 함께 일상의 안부를 적어 보내주신 편지들, 한국에서 조카들이 보낸 예쁜 글이 적힌 카드들, 학생들이 전해 준 감사카드들, 옛 친구들의 마음 담긴 편지들… 이제는 세상을 떠난 친구가 준 생일 축하 편지에는 그 친구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넘쳐서 마치 그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박스 한 가득 찬 편지와 카드들을 읽다 보니 정리도 못한 채 한 나절이 다 지나 갔다. 버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특별한 기억이 담긴 편지들은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다시 보관용 박스에 넣었다.
우리는 편지가 이메일로 대치되고 이메일도 길어서 이제 왠만한 대화는 텍스트 메세지나 카톡으로 전달이 되는 세대를 살고 있다. 이런 때에 몇 십년 전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삶 같다. 그러나 그 편지들은 나에게 바쁘다는 명목아래 잊고 살던 사랑과 우정, 그리고 격려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글로 표현된 그 마음들이 지금의 나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때로는 힘들고 지쳐 마음이 무너질 때 곁에서 용기를 주던 작은 글들은 나에게 큰 버팀대가 되어 주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렵겠지만 잘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밝은 앞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응원을 보내 준 마음의 글들이다. 이제 교수직을 내려 놓았으니 이전 보다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조금 더 여유로워질 시간을 마음을 담은 편지나 카드를 쓰는데 사용한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나의 마음을 담은 글 귀 하나로 외로운 영혼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linda.pyun@itsla.edu
09.0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