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대 교회 시절에 듣기에 생소한 ‘날 연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1900년 전후 시대는 서울이나 평양을 제외한 전국적인 산업이 농경중심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미국 선교사들이 주로 복음을 전하는 지역이 역시 농경 사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사철에는 전적으로 생업에 매달리는 시대였기에 활발한 복음 활동에 제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부들은 가을 추수를 마치고 다음 해 봄철까지는 길고 긴 겨울철의 농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윷놀이와 도박에 빠지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전적인 복음 전도와 교육과 훈련의 기간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 당시의 열린 부흥사경회나 심령부흥회는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한 주간, 혹은 두 주간씩… 그것도 하루에 새벽부터 오전과 밤 시간 늦도록 말씀과 신앙 훈련에 쏟았습니다. 매일 오후마다 구역들을 정하여 가가호호 축호 전도와 거리 전도도 실습했습니다. 받은 은혜와 말씀의 진리가 꿀맛 같아서 아예 교회당 마룻바닥에서 숙식을 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성회가 마치는 날에는 각자가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것처럼 그 동안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특별 작정 감사헌금을 드리곤 했지만 주로 농촌 성도들에게는 현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현금보다 더 귀한 날 연보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농사짓는 일에 시간을 다 쏟으면서 하나님 앞에 제대로 충성하지 못한 부족을 농한기를 이용해서 보답할 마음의 각오를 모아 며칠을 작정하여 하나님 앞에 ‘날 연보’를 작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연보’는 1904년 11월 북장로회 선교 구역인 평북 철산 사경회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그 다음 주간에는 선천 사경회에서는 625일을, 의주 교인들은 524일을, 강계 교인들은 720일의 날을 작정하여 연보 했다고 합니다. 2년 사이에 이 ‘날 연보’ 헌신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곳곳 마다 집회 마지막 날에는 의례적으로 성회 감사헌금 대신에 시간을 바치는 날 연보 헌신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총 1천일을 바치는 교회도 있었는데 진남포에서는 어느 부인 성도가 1년 중 6개월을 전도 하는 일에 바치겠다고 서약했다고 합니다. 이런 날 연보 헌신과 운동이 ‘백만 구령 운동’의 큰 역할을 제공했습니다. 1910년 한 해 동안에 바쳐진 날 연보가 10만 일을 넘었는데 계산해 보면 274년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헌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날 연보를 했던 성도들은 매서인이나 전도 부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무급으로, 자비량으로 헌신하며 전도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런 한국의 날 연보가 아프리카 선교사들에게도 알려졌다고 합니다. 당시의 평양신학교 교장이었던 마펫 선교사의 보고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서편 흑인교회에서 조선교회 성도들의 날 연보 소문을 듣고 이것을 모방하여 암놀 교회에서는 교우들이 3,465일을 날 연보를 작정했고, 풀런 교회에서는 5,995일을 전도하는 일에 날 연보를 작정하여 신입교인들이 229명이 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도저히 상상조차도 불가능한 우리 초대교회 선배 성도들의 헌신이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습니다.
어제 밤에 뉴욕실버선교학교 37기 종강예배와 도미니카 단기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면서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현대적 가치관 속에서 자신의 생업을 제쳐두고 일주일간 날 연보를 하는 27분이 주일 오후부터 토요일까지 도미니카 선교지로 파송을 받아 떠납니다. 지금까지 20년을 지나오면서 어림잡아 2,000명의 날 연보를 드린 실버 선교사들이 중남미 단기 선교에 헌신해 왔음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이제 여름 방학과 휴가철이 다가오면서 교회들마다 젊은이들과 가족단위의 단기 선교 훈련자 모집 광고들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교회마다 우리 한국교회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준 ‘날 연보’ 헌신을 교회들마다 이어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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