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의 새벽은 몹시 분주하다. 누구와 이야기 하는 사람도 거의 없이 달리기하듯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가? 맨해튼은 분주함으로 스스로의 새벽을 깨운다. 맨해튼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든 도시의 새벽 풍경은 비슷할 것이다. 새벽 분주함이 멈추면 아침의 부산함과 하루의 번잡함이 이어진다. 이렇게 번거로이 도시를 오가는 이들의 꿈은 무엇일까? 이즈음 조용필의 “꿈”이 등장해야 한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길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 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도시를 찾는 이의 꿈은 빌딩 속 한 초라한 골목에서 눈물을 먹고 마심으로 서서히 깨어진다. 하지만 아직 도시 자체의 꿈은 살아 있다. 도시는 경제와 정치, 사회와 교육, 예술과 과학 등의 씨줄과 날줄로 그 꿈을 엮어간다.
도시의 꿈은 유효(有效)하다. 물류와 지식의 소통 가운데 도시는 생산성을 높이고,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안전과 안락의 성을 쌓는 그 꿈 말이다. 하지만 도시가 간과(看過)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죄이다. 도시가 자기 스스로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교만의 죄, 멈출 수 없는 탐욕과 정욕의 죄를 도시의 화려한 벽지와 깔끔한 바닥재(材)로 사용하였다. 도시는 죄를 버리지 않는 한 심판을 예약한 셈이다.
이제 도시는 옛 꿈을 버리고 새 꿈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마천루(摩天樓)를 자랑하려던 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야 한다. 도시는 하나님의 도시로 다시 재건축 되어야 한다. 도시는 하나님을 모신 곳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하나님을 모신 도시는 다르다. 무엇보다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새벽의 풍경이 아주 다르다. 스스로의 분주한 새벽이 아니라 주의 도우심을 그 새벽에도 기다린다. 그 자신은 뛰지 않고 “새벽 날개”를 펴서 비상(飛翔)한다(시139:9). 날아오르면서 환희의 아침을 맞는다. 그날에 다가오는 예측 못할 격동(激動)의 일들이 좌절의 이유가 되지 않고 더 높은 곳으로 오름의 기회가 된다. 날개를 편 도시는 멀리 본다. 깊이 본다. 무엇이 지나가는 것이며 무엇이 머무르는 것인지 분별한다. 날개를 가진 도시를 대적할 세력은 없다. 그 위치부터 몇 수(手) 아래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날개는 피난처로서도 제격이다. 꿈을 가지고 도시로 몰려든 자의 통곡이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위로와 새로운 용기를 자아내는 주님의 속삭임이 점점 커져 도시의 장엄한 노래가 된다. 하나님의 도시는 걷지 말고, 달리지 말고, 날아야 한다. 왜냐하면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자명(自明)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도시만이 날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