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나무골 텃밭 이야기(6): 사랑만 남습니다

박동서 목사 (엘크그로브 가스펠교회)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 2000년은 서양사와 세계사의 역사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와 국가, 민족과 온 세계를 향한 그 영향력이었습니다. 기독교로 말미암아 남녀의 차별, 계급의 차별, 인종의 차별이 무너지거나 감소하였고, 민주주의와 정의 구현에 측정조차 할 수 없는 공헌을 한 게 사실입니다. 표면적으로 들어나지 않았어도 사회적 약자들을 돕거나 돌보는 고아원, 양로원, 및 자선 의료 기관의 설립, 등 사회봉사를 거의 주도해왔습니다.

그랬던 기독교의 위상과 평판이 이제는 국민들과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해가면서 그 숭고한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노출된 구원파와 같은 사이비 이단 종파의 모습들은 불신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불신만을 더 가속화시키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신뢰를 잃고 분열되어 있는 것은 비단 정부와 정계만이 아닌 듯합니다. 나라와 민족 전체가 탁류에 휩싸여 표류하고 있습니다. 교계도 보수와 진보로 양분되어 언쟁만 거듭하지만, 어느 쪽도 대다수 성도들과 국민들의 진심어린 성원도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라도 교회도 진정한 리더십의 상실과 부재가 심각한 문제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비관과 자책에만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가 더한 위험과 역경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소수의 신실한 무리들과 교회들을 통해서 큰 각성과 회개, 부흥과 개혁을 이끌어 내셨던 역사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노아 한 사람의 순종은 전 세계가 홍수로 심판을 받으며 전 인류가 멸종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인류가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타락한 이방 문화 속에서 우상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가던 아브라함도 주님의 부르심에 따랐을 때 믿음의 조상으로 거듭나는 위대한 소명을 감당합니다. 양치기 소년으로 집안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던 다윗은 사무엘 선지의 뒤를 이어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목자왕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는 당대 최고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종이 됩니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바울을 사용하셨고, 어거스틴을 쓰셨으며, 루터와 칼빈, 존 낙스와 조나단 에드워드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오셨습니다. 그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날도 계속 굴러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대속의 역사 뒤에는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압니다. 왜 우리를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진노가운데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 밖에는 달리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고 했고, 아울러 사도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 5)라고 분명히 말씀 속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명함을 받았습니다.

이 사랑은 더 이상 강단에서만 선포되거나 교실에서만 가르쳐지는 화병 속의 꽃과 같은 전시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이 아버지의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고, 전파되며 세상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사랑은 조건도 없고, 계산도 없으며, 오히려 이 사랑 때문에 손해도 보고, 희생도 감수하며, 마음까지 아파해야 하는 어쩌면 어리석어 보이는 헌신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랑을 말로만, 교리로만 떠들며 거룩의 옷을 입고 지내 온 제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과 수많은 동역자들, 성도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그 사랑으로 용서받기를 간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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