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최근에 거룩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주제에 관해서 교인들이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지부터 걱정을 했다.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거룩’이라는 주제는 고리타분하며 시대에 걸맞지 않은 생뚱맞고 폐기처분해야 할 고목처럼 여겨질 것으로 느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어리석은 상념이 드는 나 자신의 생각이 많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까지 거룩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 문제를 빼고는 성경의 어느 한 페이지도 설명할 수 없다. 거룩함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이 땅의 모든 다른 생물들과 달리 사람만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살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핵심은 한마디로 거룩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거룩한 존재로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셔서 거기에 사람을 두시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다. 에덴동산은 죄가 없는 곳이며 죄가 들어온 날 사람은 그곳에서 추방당하였다. 거룩함을 상실했기에 쫓겨난 것이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것도 우리를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이셨다. 거룩함은 구원론의 핵심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사람과 사랑으로 교제하셨던 에덴의 꿈을 회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거룩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는 거룩한 삶을 요구받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하시기 때문에 거룩함은 피해갈 수 없는 외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은 마지막에 거룩을 기초로 하여 심판하신다. 신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거룩에 기초하여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며, 동시에 자기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계20:12-15). 초대교회는 거룩한 교회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재산 전체를 다 바친다하고서는 절반만 바쳤다가 저주를 받아죽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만한 신자도 없을 터인데 부부가 함께 죽는 비극을 겪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마다 교회는 거룩해졌다. 미국의 1차, 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날 때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자각으로 떼굴떼굴 구르며 회개하였고, 영국의 웨일즈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술집들이 문을 닫는 일들이 벌어졌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역시 철저한 회개와 거룩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부흥이 일어나는 곳마다 거룩이 회복되었고 거룩함이 회복되지 않는 자리는 짝퉁, 모조품 부흥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세상이 어떤 길을 가도 교회는 거룩을 기초로 하여 나아갈 방향과 속도가 따로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의 한가운데 있는 존재이면서도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한다. 문제는 순례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놓치고 싶지 않은 데서 발생한다. 모두 다 세상과 유리된 수도원에 파묻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발은 땅을 딛고 있어도 마음만은 천상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마음조차 세상의 격랑에 휩쓸려가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하셨는데 ‘세상’에 함몰되어 맛을 잃은 소금이라 사는 맛이 없는 밋밋한 세상이 되었고 상아래 놓인 등불이 되어 온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 빠져있다.

3월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 속에서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삼일운동을 일으킨 달이다. 33인 독립선언문 서명자 중 16명이 고작 조선 전체 인구의 1.5%(26만명)밖에 안 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친 323지역 중 교회가 중심이 되어 계획하고 거사를 일으킨 지역이 120곳이나 된다. 그랬기에 기독교는 조선이라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에 어렵지 않았다. 만물이 새롭게 생성되는 이 3월에 우리는 잃어버린 맛을 되찾고 잃어버린 위치에 등불을 올려놓기 위해 우리가 붙잡기 위해 안달하던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거룩이라는 새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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