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엽 목사 (오렌지 카운티 나침반교회)
유대인들은 성숙한 신앙인을 4단계로 분류한다고 한다. 1단계는 가장 저급한 단계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다. 율법을 지키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2단계는 기분 좋으면 율법을 지키는 자다. 이런 사람은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나 헌금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도 이런 사람은 대개 자신의 기분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3단계는 나름 성숙한 사람이다. 그는 기쁨이 없어도, 내키지 않아도, 힘들어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면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런 신앙을 귀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싫어도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물론, 4단계는 율법을 즐거이 지키는 자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이 3단계의 사람이다. 4단계가 가장 좋은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은 3단계 수준에서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힘들지만, 고통스럽지만, 어렵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만 믿고 방종한 삶을 살면서 뻔뻔하게 회개한다는 한 마디하고는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부분이 이런 면이 아닐까? 3.1운동 당시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 2천만 중에 1%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인 민족대표 중에 절반에 해당하는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3.1운동의 결과로 체포된 기독교인의 수가 전체 체포된 자의 17.6%였다.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수난시기에 앞장섰고 그 결과 일반인들은 기독교를 무시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한국인의 19%는 기독교인이다. 국회의원의 3분의1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지식층일수록,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높을수록 기독교인이 많다. 그런데 기독교의 성장은 크게 둔화 내지 쇠퇴하고 있다. 게다가 기독교가 심각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네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함부로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해도 누구하나 반론을 펼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근본원인은 윤리적 실패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알량한’ 복음만을 들고서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로 몰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가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책임을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광스러운 진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더욱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자 몸부림치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인들은 말만 가지고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다. 목사들도 더 이상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만을 가르치고 번영과 축복만을 강조한다. 그러니 교인들은 점점 더 성경대로 행하지 않는다. 회개한다고 하면 되니까. 권징이나 치리도 잊혀진 지 오래다. 자연히 교인들은 적당히 죄짓고 회개 한 마디 하는 ‘편한’ 신자들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계명을 순종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성경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을 가르친다. 구원받은 자들도 이 땅에서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21). 니이체는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내게 보여 달라. 그러면 나는 당신을 구원해 주신 그분을 믿겠다”고 했다. 아마도 오늘 교회를 조롱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니이체와 같이 아우성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억지로라도 계명에 순종하고 싫어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그리스도인이 살 길이고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나아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