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청교도 102명은 영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올라 60여일의 항해 끝에 동년 11월20일 신대륙 플리머스 항에 상륙했다.그 해 겨울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자들은 이듬해 가을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다.이에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채소, 과일 등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먹었다.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다. 청교도인들은 무엇에 감사했는가? 그들은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낯선 땅에서 자신들을 생존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그 감사의 더 정확한 내용은 자신들에게 미국이라는 새로운 땅을 내려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민족”이고 아메리카라는 “약속된 땅”을 부여받았다는 것. 그래서 아메리카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이고 그곳에 미국이라는 “새 이스라엘”을 건국한다는 것. 그것이 미국 교회사에 면면히 흐르는 주제 의식이다. 물론 이러한 종교 의식은 미국의 건국 정신과도 밀접히 연관이 된다. ]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1789년 헌법 제정을 축하하면서 그해 11월 26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다. 하지만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은 추수감사절이 영국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폐지했다. 추수감사절이 다시 지켜지게 된 것은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조기 종결과 국민의 단결을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공식 발표했다. 그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감사절을 11월 셋째 주 목요일로 변경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 건국과 더불어 선포된 날이며 국경일이다. 정치적으로 제정된 이 날을 미국 교회에서 수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만큼 미국 교인들에게 미국은 단순한 정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직결되는 신성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청교도들이 처음 드렸던 감사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변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까지, 그러니까 11월 말부터 12월 말까지의 기간은 쇼핑시즌이다. 온 매장에서 40-50%의 폭탄 세일이 펼쳐진다. 모든 소비자들은 이 시즌이 올 때만을 기다린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그 동안 미루어 두었던 품목들을 구매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 한 달간 일년 매출의 30% 이상이 올라간다. 추수감사절 날은 모든 매장들과 백화점들이 쉬지만 바로 그 다음날 백화점들이 일제히 폭탄 세일을 시작한다. 소비자들은 매장 문 열리기를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에 문을 열면 매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경쟁하듯이 달려가 원하는 물건을 손에 집어 들었지만 거기에는 감사가 부족하다.
한마디로 감사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에 감사가 더욱 어렵다. 감사는 지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시간에 만족하는 삶은 미래에 대한 기대치를 현재에다 맞추기 전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감사를 말하긴 하는데 감사할 줄 모르는 게 우리들의 삶인지도 모른다.
스펄전은 “반딧불에 감사하면 촛불을, 촛불에 감사하면 전깃불을, 전깃불에 감사하면 햇빛을, 햇빛을 감사하면 찬란한 영원한 빛을 주신다”라고 말했다. 사실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미래에 대한 바람을 갖는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은 불만족스러워도 참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실은 무엇보다 그 희망이 아주 중요하다. 희망을 안고 있는 한 그는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만족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음은 곧 살만한 가치를 느낀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올해도 이제 한 달 남짓 남겨놓은 감사의 계절이 됐다.
교회들은 모두 한결같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며 ‘감사하며 산다는 것’, ‘추수감사절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새삼 감사란 주제로 추수감사절 설교를 준비하며 자꾸 ‘감사’란 단어가 그냥 단어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난처함에 봉착한다. 목사는 감사를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고 여러 행사들을 준비하는 감사절, 예정한 대로 잘 치르고 나면 아, 올해도 감사절을 무사히 넘겼구나 생각하는 감사절, 성도에게 감사절 하루 교회에 나가 딴 때보다 조금 넉넉한(?) 감사헌금을 드리고 즐겁게 먹어주는 감사절, 당연한 얘기를 늘어놓는 감사를 주제로 한 설교를 참고 들어야 하는 감사절…,
우리네 감사절은 정녕 어떤 절기인가? 크리스천이라면 한번쯤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일 년에 이맘때쯤 치르는 행사가 가미된 그런 절기라면 조금 더 깊이 묵상해야 한다.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니고 우리네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행사로 맞는 추수감사절이 아니라, 삶으로 맞는 추수감사절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감사로 살아내야 진정한 감사절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들은 추수감사절을 시점으로 감사를 단어에서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상대적 박탈감 가운데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욱 더 미래를 희망으로 드리고 감사하자. 그래서 반딧불이라도 촛불로 기대하자. 전깃불로 감사할 수 없다고 포기하면 결코 안 된다. 그렇다면 촛불은커녕 반딧불조차 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