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라

박재호 목사 (브라질 새소망교회)

성경에 보면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면서 그 기준은 형제를 사랑하는지의 여부로 미루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요일3:10-12). 그러면서 그는 우리들은 가인과 같이 되지 말고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했다(요15:12,17).

스펄전 목사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굶주리고 누더기를 걸친 거지 소년을 발견했다. 그는 소년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와서는 새 옷과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도 중에 몇 번인가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였다. 기도가 끝나자 거지 소년이 물었다. “목사님, 기도하실 때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나요?”, “그래, 맞단다. 하나님은 너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는 형제가 되겠네요?”, “당연히 그렇게 되지”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성도들은 모두다 형제요 자매이다.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의 법은 육친의 형제애(兄弟愛) 뿐만 아니라 구주 예수를 믿고 새로 거듭난 신자들 간에도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뜨거운 형제 사랑의 실천은 초대교회로부터 성도들의 특징이었다(살전4:9). 히브리서에는 이것을 신자들의 의무로 간주했고(히13:1)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다(마5:22). 여기서 형제란 믿는 자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을 통칭하는 말이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형제에게 노하는 것이 살인에 견주되는(마5:22-23) 이유는 모든 행동은 생각에서 비롯되는 내적 동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제에게 ‘노하는 자’와 ‘라가라 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가 심판을 받게 된다 함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움은 제2단계인 욕설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살인으로 치달아 가는 발전단계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형제에게 욕하는 자마다 살인자라고 하는 것이다(마5:21-22). 우리에게 형제는 소중하다. 소크라테스는 “형제는 금전보다 귀하다 금전은 자기가 보호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형제는 자기를 보호해주는 것이다. 금전은 무감각한 것이지만 형제는 동정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장자는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은 다른 옷으로 바꿔 입을 수 있어도 수족은 한번 떨어져 버리면 다시 붙일 수 없다”고 했다.

교회에서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모두 형제자매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현대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과연 교회 안에서 서로가 진정 형제자매라고 느낄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못하다. 톨스토이가 어느 날 길에서 거지의 구걸을 받았다. 돈을 주고 싶어 주머니를 뒤졌으나 그날따라 동전 한 푼도 없었다. 톨스토이는 거지에게 “형제여 마침 한 푼도 가진 것이 없어 미안하오” 하며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그때 거지는 아주 만족스런 표정으로 “돈이 문제입니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훨씬 더 값진 것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참된 형제 사랑은 친절한 말과 선한 행동에 달려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함께 섞여서 살고 있는데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에 속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며 형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계명이다(마22:39-40). 계명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다.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우리 성도들이 형제를 사랑해야함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더욱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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