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편지에서 찾아내는 그의 신학 발전

그의 글은 편지라는 틀에서 볼 때 사도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인물의 편지 연구는 시간의 간격이나 문화의 차이에 상관없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관행이다. 종교개혁 사상가 사이에서는 단연 장 칼빈(1509-64)의 편지가 가장 사랑받는다. 칼빈의 편지는 그의 내면의 묵상을 드러낸다. 그는 친구나 교인들과 관계 가운데서 편지를 씀으로써 자기 성찰의 한 형식으로 이를 활용했다.

칼빈의 편지 중 특정 시기(흔히들 말하는 1538-41년의 스트라스부르 시대)를 통해 우리는 그의 신학 발전을 검토할 수 있다.

칼빈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편지는 아예 쓰지 않았다. 이러한 함의는 세 가지 특별한 윤곽, 곧 우정과 교회와 믿음의 연합하는 능력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정

 

칼빈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하나님을 아는 체험적 지식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연합의 본질이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일종의 개인 수도원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칼빈은 정기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특별히 사역 중에 생긴 고립이 가져다준 낙담을 이기는 힘을 얻었다. 스트라스부르 시절 그가 느꼈던 고립감은 인내할 힘을 주는 우정이라는 측면을 깊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하는 것임을 더 깊은 차원에서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형제자매를 맺는 깊은 우정과 하나님과의 상호 연합이야말로 삶에서 더 큰 만족감을 누리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요소가 빠진 세상의 우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만큼이나 그를 믿는 신자들이 서로 싸워서 찢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점을 표현했다.

 

교회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 있고 윌리엄 파렐이 뉴샤텔에 있을 때) 제네바 양 떼를 섬기는 기능적인 목자였던 칼빈은 자신과 파렐이 축복의 전달자로서 제네바 사람들을 각자의 교회를 섬기는 다른 목회자들과 결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진실하고 우호적인 애정으로 말이다.

칼빈이 부재중에도 제네바 교회에 조언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에 대해 느꼈던 친밀감과 청지기직에 대한 영적 의무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한 그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는 멀리 있으면서도 감독자로서 그들을 가르치고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든지 보기에 따라서 뻔뻔스러운 영적 권위로 여겨질 수도 있는 내용을 썼다. “먼저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부탁하건대 무엇이든지 먼저 그 문제를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때 조금도 서두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다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으니,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의 편지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거리나 물질적 수단에 구애받지 않고 행사하는 진실한 영적 책임으로 보아야 한다. 칼빈은 편지를 통해서도 친교의 유대 (그리고 심지어 어느 정도의 권위)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에게 교회는 지역적이면서도 세계적이었다. 그러한 연결이 가능했던 건 신앙의 역할에 대한 그의 개념 때문이었다. 

 

믿음의 연합

 

칼빈에게 믿음이란 “신자 개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주어진 선물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삶과 하나님의 섭리라는 손길을 통해서 얼마든지 성숙한 차원에서 체험되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신앙의 형제자매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친교는 중단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기회가 되는 대로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서로 나누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9면으로 계속>

<2면에서 계속>

 

다시 말하지만, 제네바 회중 및 가까운 친구들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칼빈은 그들과의 특별한 교제를 원했다. 비록 거기에는 펜과 종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단지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만이 아니라 “특별한 애정”이 요구하는 만큼 지속적인 교제를 원했다.

칼빈은 이런 교제를 통해 드러내는 믿음과 관련하여 교회에 관한 어떤 기대를 표명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사랑의 교감, 비록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이렇게 썼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비록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증거로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서로 연합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라고 촉구했다.

제네바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칼빈은 편지를 나누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한 신학 원칙을 견지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셔서 그의 신실한 백성을 이끌어가시는 연합은 실로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라면 누구나 모든 가능한 선한 형태로 그 연합을 추구해야 합니다.” 

칼빈과 동료 개혁가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는 편지 교환을 통해서 교회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친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종종 개인적인 신앙으로 이해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공동체는 다 함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비록 (성찬식 같은) 지역별로 이뤄지는 관행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전체 공동체의 일부로서 자리를 잡는다. 

비록 칼빈은 작은 프랑스 난민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지만, 칼빈과 부써가 서로에게 편지를 쓰고 상대방의 통찰력을 즐기는(앞서 언급한 파렐과 제네바 회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기초는 이러한 공동체 성장에 기초를 둔다. 이들의 편지는 각자가 간직한 개인 경건을 진심으로 존중하면서 동시에 지역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존재하는 성도들 사이의 친교에 대한 개념을 확증한다. 

 

편지 쓰기를 통한 성화

 

훈련으로서의 편지 쓰기는 칼빈이 자기 말과 소명을 성찰하면서 제네바 사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그리고 스트라스부르와 그 너머로까지 우정을 꽃피우는 데에까지 도움을 주었다.

스트라스부르에 잠시 머무는 사이에 꾸준히 편지를 썼기에 칼빈은 제네바로의 귀환이 순조로울 수 있었다. 더불어서 유럽 전역에 퍼진 개혁파 사역과의 파트너십이 열매를 맺는 것도 가능했다. 칼빈은 부써에게 그와의 편지 교환을 통해서 얻은 혜택과 명예에 대해서 자신이 결코 “무신경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스트라스부르 편지는 칼빈이 개인적 사역의 혼란 속에서 견디게 한 힘이었고 또한 그가 풍부한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수단이었다. 이런 유익은 칼빈 개인뿐 아니라 미래의 제네바 공동체에도 유익이 되었다. 비록 칼빈이 성경의 정경을 위해서 글을 쓴 건 아니지만, 그의 글은 편지라는 틀에서 볼 때 사도 바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칼빈의 편지를 연구하고 거기에 담긴 그의 사상을 신학적인 이점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결코 뭔가를 “훔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칼빈이 편지 교환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인식했던 믿음으로 연합된 공동체 유대를 계속 이어가는 당사자이다. 비록 칼빈과 몇 백 년이라는 시간으로 떨어져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by Christopher Osterbrock, TGC

05.1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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