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끝이라면

김성국 목사 (퀸즈장로교회 담임)

 

에릭을 아시는가? 에릭 월터스토프. 대부분이 모르실 것이다. 나도 그를 모른다. 여러분이나 필자도 그를 이 땅에서 만날 일은 없다. 그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1958년에 태어난 그는 25세가 되던 1983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등반 사고로 사망했다. 에릭을 “아버지의 통곡”이라는 1992년도 발간된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통곡”은 에릭의 아버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그의 아들 에릭을 잃고 애가(哀歌)와 같이 쓴 책이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교수는 개혁주의 관점을 가진 기독교 철학자이다. 글로 표현된 그의 아픔이 다분히 개인적이고, 오래되었고, 먼 곳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너무 가까이 느껴지는 아픔이었다. 그의 글에는 이런 표현도 있다. “에릭은 가고 없다. 여기 그리고 지금 그는 가고 없다. 지금 나는 에릭과 얘기할 수 없고 지금 그를 볼 수 없고 지금 그를 껴안을 수 없으며---바로 그것이 내 슬픔이다.” 죽음이 끝이라면 월터스토프 교수의 슬픔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믿음을 가졌던 에릭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전 사순절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는데 눈가에 잠시 눈물이 담겼다. 성도 중에 몇몇 분은 그 눈물을 잠깐 보았겠지만 내 마음에 계속 흘렀던 눈물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그날은 아버님이 1992년도에 하나님 아버지 나라로 가신 날이었다. 그날따라 설교 제목이 “본향을 남긴 사람”이었다. 성경에서 만나는 모든 믿음의 선진(先進)이 그러하셨듯이 아버님도 태어나신 황해도 고향을 사뭇 그리워하셨으나 늘 “더 좋은 본향을 찾는 자”로 사시다 본향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셨다. 목회의 길을 걷고 있던 아들에게 평생 그 사명에 흔들리지 말다가 만나자는 듯이 “복음전파, 복음전파, 복음전파” 세 번을 외치시고 떠나신 아버님이 그날따라 더욱 뵙고 싶었다. 죽음이 끝이라면 아버님을 다시 뵐 일도 없을 것이요, 어떻게 “복음전파”했는지 말씀드릴 앞날도 없을 것이다.

지난 22일 저녁에는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한 공연장에서 백수십 명이 사망하고 그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몇몇 무장 테러리스트의 무차별 난사(亂射)가 빚은 끔찍한 비극이었다. 지난 26일 새벽에는 볼티모어항(港) 다리에 대형 화물선이 충돌해 그 위를 지나던 몇몇 차량이 물로 떨어져 여러 사상자를 내었다. 영화에서나 볼만한 사건들이 며칠 새 강대국이라 자처하는 러시아와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사망한 이들이 그날들이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예측 못 할 죽음은 누구에게나 가까이 있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끝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로 죽음 이후의 모습이 영원히 나누일 뿐이다. 

 

최근에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던 집사님의 장례예배를 집례하였다. 꽃샘추위인지 약간 매섭고 바람 부는 벌판에서 하관 예배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유가족과 함께했다. 죽음이 끝이라면, 그날 남겨진 아내와 세 딸과 가족들 그리고 모든 조문객은 하염없는 슬픔과 절망으로 더욱 추웠을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베다니 동네 무덤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고,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살아나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죽으면 천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맞닥뜨린 죽은 것 같은 일들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슬퍼하거나 포기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계속 떠들 것이다. “교회는 죽었다” “너는 끝났다” 그런가? 아니다. 그런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교회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외치시면 오늘의 어떤 나사로도, 오늘의 어떤 마른 뼈들도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우리에게도 죽음이 끝이 아니다.

 

03.3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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