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가 사는 뉴욕에는 폭설이 있었다. 영화 ‘겨울왕국’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모든 만물이 눈과 함께 얼어붙듯 했다. 교회 앞 도로와 교회 주차장에 눈이 쌓여갈 때, 그 눈을 밤에도 치우고 낮에도 치워 새벽예배도 드렸고 주일예배도 무난히 드렸다. 지금은 화창한 날씨이지만 폭설 때에 도로변에 세워 놓았던 차를 바로 끄집어내지 못해 그 눈이 차바퀴를 에워싸고 얼어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차들도 꽤 있다. 상황은 같았는데 반응에 따라 각각 회복이 다름을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은 반응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자아낸다. 꼭 십 년 전이다. 2012년 2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우리 곁을 떠나신 분이 있다. 고(故) 강영우 박사이시다. 그에게는 물리적인 시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쓴 책의 제목은 이렇다.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그는 희망만 보았기에 희망만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들어 보자. “...나의 장애는 저주가 아닌,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신 축복이었다. 지난 50여 년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을 통해 감히 꿈꿀 용기조차 내지 못했던 일들을 나는 해냈다....”
달라스에서 고(故)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암살당한 도로를 지난 적이 있었다. 그가 냉전의 시대에 하늘을 바라보고 우주 도전에의 희망을 외쳤고 그것이 달 착륙으로 이루어졌던 역사적 일들이 새록 기억났다.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땅과 전리품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신하들이 걱정스러워 물었다. “대왕이시여, 이렇게 다 나누어주시니 대왕 것은 아무 것도 없나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신하들을 침을 꼴딱 삼키며 귀를 쫑긋하고 왕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희망이다. 내겐 희망이 있다.” 그는 희망을 말하였다. 꺼지지 않는 희망, 불타오르는 희망의 언어가 그를 역사의 인물로 만들었다. 마틴 루터 킹도 인종차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겐 꿈이 있다’고 희망을 말함으로 역사의 방향을 새롭게 하였다. 험한 바다 물결이 넘실대지만 그것을 넘어가자는 희망의 노래가 있다. 장미꽃 가시에도 아픔과 거절과 외로움 가운데도 감사한다는 희망의 찬양도 있다.
갈매기도 말한다. 그의 이름은 조나단이다. 그가 해변 가에서만 먹이를 찾는 다른 갈매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더 높이 날 수가 있단다. 우리는 더 먼 바다를 볼 수가 있단다." 조나단은 그렇게 희망을 말했다. 다른 갈매기들은 희망을 말하는 조나단을 미친 것으로 여겼다. 오래전 리차드 바크의 원작으로 만든 영화 ‘갈매기의 꿈’을 보면서 절망의 사회에서 희망을 말하기는 쉽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해가 바뀌고 달도 바뀌었는데 암울함이 계속된다. 계속 절망할 것인가. 아니다. 이러한 한때에 우리가 계속해야 할 일이 있다.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희망하기를 자칫 놓치면 그 회복의 시간은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희망은 근거 없는 신기루가 아니다. 그저 단순 요망 사항인 수준이 아니다. 그 희망은 절대 희망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확신 있게 희망을 말하면 거기에 권세도 있고 실체도 따른다. 그러니 아직 시대가 짙은 어둠 가운데 있어도 의심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희망을 말하라.
02.05.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