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뉴저지에 계신 은사님을 찾아뵈었다. 오랜만에 뵙는 것이다. 한국에 오래 머물다가 잠시 미국에 오신 틈을 타서 뵈온 것이다. 집이 원래 뉴저지이신데 집은 잠시 들리시고 다시 한국으로 서둘러 돌아가신다. 무슨 일인가? 한국에서 계속 치료받으시기 위해서이시다. 작년 초 한국에 나가셨다가 폐암 4기 진단을 받으시고 그곳에서 바로 투병의 시간을 갖게 되신 것이다. 그날도 통증이 심하시다며 약간 비스듬히 앉아 계셨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다. “기도를 많이 했지. 고쳐달라고. 너무 아팠어, 기도해도 빨리 낫지 않더구먼. 그러다가 기도가 무엇인지 성경을 보면서 다시 묵상을 많이 했지. 그러고는 내 기도가 달라졌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지. 예수님도 그렇게 기도하셨잖아. 그 다음에 내 마음에 찾아온 것이 무엇인지 알아? 평안이야. 말할 수 없는 평안.”
지금까지 보신 간판이나 벽보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었는가? 필자는 대전에서 8년 가까이 사역했었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이 대전 시내에서도 수많은 간판, 벽보, 안내문 등을 볼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태권도장 위에 써놓은 글귀이다. “우리는 태권도를 빠르게 가르치지 않고 바르게 가르칩니다.” 빠른 것이 대세인 시대에 바름을 강조하다니. 나에게도 그랬듯이 그것을 본 모두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으리라. 내게 그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글귀가 있었다. 대전 어느 교회 담에다가 크게 써 붙여 놓은 글귀인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크게 한 글자씩 길게 써 붙여 놓아서 차를 타고 지나가다 멀리서도 잘 볼 수 있었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 하십니까?” 그렇다. 이 세상에 걱정 근심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그 걱정 근심을 뛰어넘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기도라고 아주 선명히 써 붙여 놓은 것이다. 정말이지 그 교회 앞을 지나며 그 글귀를 볼 때마다 위로가 넘쳤다. 대전 시내에서 보았던 “바름”과 “기도”를 엮어보니 “바른 기도”였다. 무엇이 바른 기도일까? 오래전 제자훈련하면서 외웠던 말씀에 답이 있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모든 일에 감사로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임을 깨달았다. 다음 절에 그런 기도자에게 평강이 깃든다고 말씀하신다.
프랜시스는 향락과 전쟁의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흥청망청 놀던 그가 기사(騎士)를 꿈꾸며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포로도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 죄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는 향락과 싸움의 지난 삶에 넌더리를 냈다. 이제 그는 세상의 향락과 싸움이 아니라 청빈, 겸손,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기도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사람들은 이 기도를 “평화의 기도”라고 부른다. 그에게는 삶과 기도가 일치했다.
온 세상에 기도가 가득 차 있다. 그 기도 가운데 평화의 기도는 분명히 따로 있다. 평화의 기도는 내 뜻을 버리고 주님 뜻에 맡기는 기도, 평화의 기도는 감사로 기도하는 바른 기도, 평화의 기도는 삶과 기도가 일치하는 사람의 기도임이 자명하다.
[정정] 본지 제 1846호 2면 ‘발행인칼럼’ 넷째 줄 고열(高烈)을 고열(高熱)로 바로 잡습니다. 또 마지막 줄 ‘남이 있다’를 ‘남아 있다’로 정정합니다.
10.2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