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넘어 통섭(統攝)으로

지금 이 칼럼을 읽는 사람 중에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이 있을까?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럴 수 있다. 물리적인 감옥은 아니지만 “타인의 담”에는 갇혀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그 사람 말을 거부하면 내게 크게 실망할 거야” “내가 이런 말을 내비치면 그 사람은 다시는 연락 안 할 거야, 아예 나를 떠날지도 모르지” 등등의 생각으로 자신을 타인의 평가라는 감옥에 가두어 두고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분명히 자기 견해가 있음에도 타인의 눈치를 보며 거의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삶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럴 필요는 없다. 자기 자신도 모른 채 자기를 일생 가두어 두었던 “타인의 담”이라는 감옥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그 타인은 정작 자신의 삶에는 성실할 가능성이 적다. 자기 성찰에 분주한 사람이 왜 맨날 남 참견을 그토록 하겠는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그런 타인의 의견과 평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어렸을 적 기억이 난다. 골목의 집마다 담벼락이 있었고 그 담 위에 날카로운 병 조각을 심어 놓거나 무서운 철조망으로 이중삼중으로 집을 보호 관리(?)하는 것을 보았다. 타인의 의견도 평가도 필요 없으니 내 인생에 담벼락을 세우고 그 위에 병 조각을 심고 철조망을 둘러 내 마음대로 살자는 것인가? 그 또한 적절치 않으리라. 그렇다면 어떤 삶이 필요할까? 타인의 담에 갇혀 사는 것도 나 홀로 담쌓고 사는 것도 온당치 않다. 통섭(統攝)이 필요하다. 통섭이란 어울림인데 그냥 어울림이 아니다. 통섭은 서로를 이끌어주고 인정해주는 어울림이다. 너와 내가 어울려 차원 다른 우리로 살아가는 것이 통섭의 삶이다. 

 

자기의 의(義), 자기 고집이 유별났던 바울은 “자기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타의의 담”에도 갇혀 사는 모순의 삶을 살았다. 자신의 담 너머에 있는 타인들의 평가에 늘 귀를 기울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다메섹 사건 전에 바울은 그런 식으로 살았다.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는 통섭의 삶으로 바뀌었다. 다메섹은 바울의 담을 허무는 사건이었다. 하나님과의 담은 물론이요, 자신의 담 그리고 갇혀있던 타인의 담까지 일거(一擧) 허무는 일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있었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저서 “통섭(Consilience)”에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제(諸) 학문은 단독적으로 존재하기에는 불충분하고 서로가 함께 어울리는 “통섭”이 필요함을 갈파하였다. 학문의 통섭은 이전부터 있었던 자기 전공과 함께 그것과의 연관을 전혀 생각지 않는 제 2전공을 택하는 생계적(?) 차원이 아니라 본질적 차원의 방향이다. 경제학은 여러 수치와 분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심리를 함께 살펴보아야 하고, 심리학은 그 사람의 마음만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뇌의 상태에 대한 생물학적 조사도 요청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통섭의 학문 시대가 이미 도래 하였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면 팬데믹 이후 더욱 요청되는 삶은 서로를 경계하는 세분화(細分化)의 삶이 아니다. 서로의 담을 넘어서는 통섭의 삶이 필요하다. 

10.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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