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설교자는

설교자는 확신하는 자이다. 무엇보다 설교자는 모든 성경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풍조에 밀려 성경 대신 이것저것에 기웃거리는 자가 될 것이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그리고 설교자는 부르심을 확신해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또 설교를 하면서도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모호해 한다면 정체성을 잃은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일으킬 참담함과는 비교 안 될 재앙을 던지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의 변화의 능력을 확신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에 이런 변화의 능력이 있는지 모르고 설교한다면 미사일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미사일을 다루는 군인과도 같을 것이다. 설교로 변화될 일들에 확신이 없다면 주일 예배, 그 소중한 시간에 설교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설교자는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설교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 

 

설교자는 대언자이며 선견자며 선지자이며 예언자이다. 물론 구약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대언자 선견자 선지자 예언자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자도 분명히 말씀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설교의 역할이 어찌 과(寡)하다 하겠는가. 오늘의 설교자도 온갖 박해를 받고 있다. “내 말을 내가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신 18:18b);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사30:10);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암7:12-16a).

 

설교자는 가슴 앓는 자이다. 자신이 당한 일이 억울해서가 아니다. 복음에 무관심한 자들 때문에 아프다.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오래 동안 복음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대놓고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 아예 주님을 등지고 가는 자들을 바라보며 저들이 앞으로 만날 일들을 생각하며 가슴앓이를 한다. 설교자는 살길이 말씀밖에 없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살길을 거부하는 자들을 떠올리며 끙끙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건축가이다. 설교자는 설교라는 멋진 집을 만든다. 어떤 집도 디자인 없이 세울 수 없다. 디자인이 없는 집은 보기에 안 좋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아름다운 디자인에서 아름다운 건물이 세워지고 견고한 디자인에서 견고한 집이 만들어지고 웅장한 디자인에서 웅장한 집이 탄생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며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09.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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