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교회로 배달된 작은 상자를 받았다. 상자만 작은 것이 아니었다. 무게도 아주 가벼웠다. 하마터면 많은 우편물 가운데 휩쓸려 한 동안 못 찾을 뻔했다. 작게 쓰여 있는 내 이름을 확인하고 그 상자를 열어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있었다. 주문하고 기다리던 책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꼭 읽고 싶은 책이었기에 반가움이 더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작은 상자 안의 더 작은 책이 펼쳐 놓은 내용은 크고 풍성했다. 작은 것이라고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다. 작은 갈대상자 안에 담겨진 삼 개월 된 아이가 장차 모세가 아니었던가. 사내아이는 다 죽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환경 속에 넘실대는 강물위에 던져진 아기는 작은 상자 안에서 미래의 위대한 지도자가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주 또 다른 책 한권을 받아 보게 되었다. 책 제목 때문에 책장을 바로 열어 넘길 수 없었다. “아가야, 어서 와 많이 힘들었지?” 라는 제목이 눈으로도 들어오면서 마음에도 담겨왔다. 한국에서 베이비박스(Baby Box)를 운영해 오신 이종락 목사님이 지으신 책의 제목이 책을 읽기도 전에 왠지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펼쳐보니 목사님이 유수한 필치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게 된 계기와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써내려 가셨다. 결혼 초기 많이 방황했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또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둘째 아이를 키우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다. 목사님은 여러 장애 아동들을 맡아 키우다가 2007년 4월 어느 날 새벽 3시 즈음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 후 목사님이 여러 이유로 버려질 아이들을 작은 상자에 담아 놓기만 하면 어떡하든 잘 돌보는 베이비박스 사역을 시작케 한 바로 그 전화. “목사님, 죄송합니다. 아기를 교회 앞에 데려다 놨습니다.” 교회 밖을 나가보니 굴비상자에 담긴 아이가 있었다. 그 굴비 냄새를 맡고 온 고양이가 상자를 헤집고 아이를 할퀴기 직전 그 아이를 교회로 옮겼다. 까만 비닐붕지도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우유병 한 개. 먹던 분유 한 통, 기저귀가 다섯 개가 있었다고 한다. 목사님은 그 아이의 이름을 온유라고 지으셨다고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김춘수 시인이 무명(無名)의 “꽃”에 빛깔과 향기에 맞게 이름을 붙여 불러주었던 것처럼, 이종락 목사님이 굴비상자의 아이를 “온유”라고 아름답게 불러주었던 것처럼 우리의 이름을 불러줄 그 누구가가 필요하다. 아니 이미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다.
베이비박스. 하지만 그 작은 상자 안에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있다. 그 상자에는 그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도 담겨 있다. 우리 주변에 작은 상자가 도처에 있다. 너무 작고 화려하지도 않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작은 상자들. 가만히 귀 기울여보자. 그 안에서 신음같이 아주 작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 안에서 장차 모세가 울고 있다. 그 안에서 위험에 처한 온유가 울고 있다. 그 안에서 이름이 없어 서러운 무명(無名)의 꽃이 울고 있다.
08.2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