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면 그대의 그림자를 팔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었다. 물론 소설에서이다. 프랑스인이지만 독일어로 그 작품을 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19세기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 슐레밀이 자신의 그림자를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판다. 슐레밀은 그림자를 판 대가로 엄청난 부와 명예와 사람들의 부러움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림자가 없이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돈이 많이 있어도 그림자가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숨어 지내야하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그림자를 되찾으려 하니 그림자를 돌려받는 대신 영혼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나마 영혼을 지키기 위해 슐레미는 그 이상의 거래를 하지 않는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깨닫는 인생들의 이야기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림자는 우리들에게서 없어져도 별 문제가 아닌듯하다. 그림자는 언제나 깜깜한 색깔이어서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그림자를 팔지는 않아도 아예 없애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림자를 걷어찼다. 아무리 걷어차고 밟아도 그림자는 같이 살기 힘들고 서럽다고 내빼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그 그림자로부터 자신이 빨리 도망쳐도 보았다. 웬걸, 그림자도 같은 속도로 따라왔다. 그림자는 결코 떼려야 뗄 수 없었다. 그림자가 우리에게 전혀 필요 없다면 하나님께서 왜 주셨겠는가. 하나님이 주신 그림자를 싫다고 필요 없다고 없애려는 것은 헛고생이요 그림자의 소중함을 경(輕)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낮”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도 필요함을 아시고 주신 하나님께서 “빛”도 필요하고 “그림자”도 꼭 필요하시기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정진명 시인은 그림자를 이렇게 말한다. “허공에 한껏 부풀려진 제 영혼을 위하여/ 그림자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드러눕습니다/....높이만을 최고로 알고 중력과 싸우느라 버둥거릴 때도/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와/ 높을수록 커지는 위험을 길이로 재어줍니다/ 알록달록한 꿈 자랑하며 휘날릴 때/ 화려한 빛깔들을 가장 단순한 색으로 바꿔서/ 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품는 쉼터가 되어줍니다/ 감당 못할 무슨 일로 풀죽은 저녁 무렵이면/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며/ 지평선 끝까지 키를 늘이고 어깨 다독입니다/....한평생 곁에 머물러 날 지켜주다가/ 무덤에서 비로소 함께 사그라지는 당신, 내 영혼의 짝” 시인은 자기 그림자를 자기 영혼과 평생 함께하는 짝이라고 부른다.
사는 동안 나의 그림자를 멸시하지 말아야지. 그림자는 내지르는 소리는 없어도 유익한 교훈을 항상 조용히 들려주지 않는가. 또 의리로 말하자면 그림자만한 것이 없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다 내 곁을 떠나도 그림자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 그 시간까지 항상 내 곁에 있지 않겠는가.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원제목은 “페터 슐레밀의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그림자는 색깔도 그렇고 머무는 위치도 그렇고 언제나 평범(平凡) 이하에 있다. 그러나 그 존재의 의미는 심오하고 환상적이다. 어떤 가격이든 그림자를 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겠다.
08.1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