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뼈 두 곳이 부러졌다. 중학교 체육시간 때의 일이었다. 학급 친구들과 줄을 서서 앞에 놓인 뜀틀을 한 명씩 뛰어 넘는 운동을 하던 때에 내 순서에서 나는 뜀틀을 완전히 넘지 못하고 내 손을 깔고 앉아 그런 사고가 난 것이었다. 몇 주 무거운 깁스를 하고 지나는 동안 어린 마음에 선생님이 왜 이런 운동을 하라고 하셨나 원망도 되었다. 아킬레스건이 완전히 끊어진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교역자수련회를 마치고 교회로 돌아가기 직전에 교역자들이 편을 나누어 아이스크림 내기 족구시합을 하던 중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날의 입원과 몇 개월 걷는데 불편을 겪으면서 그 날 그냥 아이스크림 내가 사주고 말 것 괜히 내기시합을 했다고 스스로를 향해 원망을 던졌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잠시 불편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 나았다. 여기저기 부러지는 것과 손목이 아예 잘라진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다시 봉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마지막 주일은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러시아권 예배 설립 5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이었다. 그 날 오후 다민족이 함께 모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배시간을 가졌다. 여러 순서가 있었고 러시아권 형제 네 명과 자매 다섯 명이 호흡을 맞춘 바디 워십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몰랐다. 형제도 다섯 명이었어야 하는데 네 명밖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를. 그 전날, 곧 5월 마지막 주일 전 토요일이었다. 바디 워십을 준비하고도 주일에 나오지 못한 형제 한 명이 직장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오른 손목이 기계에 말려 잘라졌고 다시 붙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형제는 이란사람이었다. 그 가족이 다 러시아권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그 가족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견디다 못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오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온 미국에서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난 것이다. 그 형제는 24살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이 만난 사고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고난과 신앙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너무 부끄러웠다. 신앙이 있는 척하면서도 일만 만나면 원망이 앞섰던 내가 아니던가. “고난과 신앙은 같이 가는” 것이라는 그 형제 아버지의 초연(超然)한 고백에 나는 숙연(肅然)함을 가졌다. 그 이란인(人) 형제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병원에서 김치가 가장 먹고 싶다고 했다. 병원으로 갈비탕과 함께 김치를 가져다주었고 형제는 맛있게 먹었다. 다민족으로 가는 교회가 자신의 사고로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또 같이 힘을 내어 전진하자는, 오히려 다른 자들을 위로하는 처사(處事)가 아니겠는가. 얼마 지나면 회복되는 손뼈가 부러진 것이 아니라 다시 봉합 못할 손목이 잘라졌는데 그 가족이 보여준 신앙의 내공(內功)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 새벽 카드를 받았다. 지난 주간에 교회를 방문하셔서 처음 뵈었던 어느 신학교 교수님 내외분이 어제 교회에 맡겨주신 카드를 오늘 새벽 전달받은 것이다. 내게 보낸 카드는 그 이란 형제에게 보내주라는 오픈된 작은 카드를 담고 있는 큰 카드였다. 내가 그 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구나 할 정도로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여유가 많지 않으신 교수님 내외분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 이란 형제가 자꾸 생각이 나서 기도하게 되었고 교수님 부부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위로금을 함께 전달해 달라고 큰 카드에 적어 놓았다. 손목이 잘라졌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경이롭다.
06.1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