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밝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힘겨움이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 미국을 비롯 여러 나라에서 백신접종이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 코로나19의 어두움은 짙기만 하다. 출발하는 현실의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말 것은 모든 것이 시작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작보다 더 중요한 나중도 있다. 시작의 미약함만 바라보면 안 된다. 미약함 속에 깃든 나중의 창대함을 희망하며 2021년을 출발하자. 새로운 희망이 없다면 어찌 새해를 새해라고 부르겠는가. 새해가 없이 긴 겨울을 떨쳐낼 봄도 오지 않을 것이고 녹음(綠陰)으로 우거질 여름도 없을 것이다. 미약한 출발이라고 새해의 첫 걸음을 스스로 무시하지 말자.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으셨다. 예수님의 처음은 사람들의 냉대로 가득했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은 편히 누워 있을 곳조차 없으셨다. 그는 온 세상의 주인이셨고 왕이셨고 빛이셨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한 어두움의 사람들은 환영 대신 헤롯 같은 이가 보여준 위협으로 맞이하였다. 그 어려운 시작은 더 참담한 죽음으로 끝나는듯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었다. 부활하시었다. 그리고 마침내 영광 중에 승천하시는 심히 찬란한 나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미약한 시작 속에 심히 창대한 나중을 본 자는 극히 소수였다.
예수님의 시작은 사실, 죽겠다는 시작이셨다. 죽음을 수용한 시작은 죽음을 극복한 나중을 만든다. 올해의 시작을 어떻게든 살겠다고 시작하면 무서워하다가, 타협하다가 한해를 보내기 쉽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시작하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으리라. 어떤 도전도 유혹도 넉넉히 이기리라. 죽음을 수용한 시작은 미미하고 위험한 것 같지만 가장 강하고 가장 풍성한 나중을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하다.
“시작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거듭남”은 구원의 시작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거듭남이 미미하게 여겨지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누릴 창대한 축복의 시작에 불과하다. 거듭남의 여정은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른다. 거듭남이 소중하지만 거듭남으로 구원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의 광대함을 거듭남이 이미 담고 있다. 그러나 구원의 광대한 나중을 보는 신령한 눈이 열려 있지 않으면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크고 작은 돌부리에 넘어지고 쓰러지고 시험에 들어 스스로에게는 물론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을 초라한 것으로 곡해토록 만든다. 올해 나의 구원은 이 시작 때보다 저 끝날 때에 더 풍성하게 자라나고 열매 맺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한다.
2015년 1월 4일은 그 해의 첫 주일이었다. 그날 아주 미약한 시작이 있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첫 중국어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다민족 선교 이야기를 건네 들은 사람 중에 “시작은 했지만 그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매년 그 미약했던 시작이 창대함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것을 모두가 보고 있다. 심지어는 가장 어려웠던 작년 2020년에도 더 큰 창대함을 한한 달음박질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아직 다민족 선교의 마지막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다. 주춤할 가능성에 대해 너무 신중하게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뜻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다민족 선교의 창대함에 대한 비전과 믿음까지 점잖게 감출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2021년, 모든 것의 시작이 미약하다. 그러나 잊지 말자.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은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나중이 되신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으신다. 우리의 출생부터 죽는 날까지 언제나 함께 계신다. 모든 일의 출발과 맺음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올해의 시작에도 올해의 나중에도 하나님은 계시다. 올해 시작의 미약함을 바라보고 암울해 하면 끝까지 함께 하시며 마침내 나중을 창대케 하실 하나님께서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01.0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