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四季)는 말 그대로 사계절의 변화무쌍함을 드러낸다. 봄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선율로서 봄의 따뜻한 볕 아래 나른함의 풍경이 전개된다. 물론 그 봄에도 긴박한 위기가 찾아온다. 여름은 어떤가. 작열하는 태양이 온 대지에 쏟아진다. 하늘에서 태양의 빛과 열만이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박도 떨어진다. 곡식은 익어가지만 지침과 불안함도 감출 수 없다. 가을은 축제다. 서정적인 가을의 선율에 가을꽃들의 냄새도 나는 듯하다. 아름다운 단풍의 이름이 낙엽으로 바뀌면서 여기저기 뒹구는 것 같은 쓸쓸함도 가을에 담겨 있다. 겨울은 스산하게 시작된다. 눈 덮인 풍경도 자아낸다. 매서운 겨울바람도 분다.
세상은 계절처럼 변한다. 일년에 네 번이나 변한다. 아니다, 더 빠르게 변한다. 그 누군가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여행했다가 일년 만에 이 겨울 다시 돌아온다면 “여기는 내가 살던 그곳이 아니야, 내가 다른 곳에 잘못 왔나봐” 하고 다시 우주선에 올라탈 것이다. 변했다. 늘 변하던 세상이 2020년 팬데믹 때에 상상이상으로 변했다. 종교,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그리고 일상에서 절망은 더 깊어지고 좌절은 더 넓어졌다. 그 변화의 질주는 멈추어지지 않을 것인데 문제는 그 변화의 방향이 발전적인 것이 아니라 변질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변하는 세상, 여기저기 둘러봐도 탄식밖에 나올 것이 없는 세상에 정녕 소망이 있는가. 확실히 있다. 화려한 예루살렘은 아니다. 그곳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지 말라. 거기에 세상을 호령하는 헤롯왕이 있었지만 그로부터 올 소망은 없었다. 그는 갈수록 혼란만 가져온다. 고요한 베들레헴을 주목하라. 거기에 세상이 외면한 진짜 왕이 계시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성탄의 예수님이 소망이시다. 성탄은 세상을 바꾸는 사건이다. 인류에게 성탄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부피는 크지 않은 선물이었다. 곧 열어본다고 하다가 바쁨 속에 선물의 존재를 잊었고 선물은 여러 서류 속에 파묻혀 며칠 째 남몰래 울고 있었다. 선물만 운 것이 아니다. 작지만 값비싼 선물(그 당시 내 형편으론 결코 살 수 없었던 몽블랑 만년필^^)을 주신 분이 더 울고 싶으셨으리라. 며칠 후 내가 그 선물을 안 열어 본 것을 알게 된 그 분의 실망감과 나의 송구함이 교차하던 그 때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성탄을 열어보지도 않고 변하는 세상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베들레헴 구유에 누인 너무 작은 아이어서 무시하는가. 그 아이에 대해 들어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놀랍지 않은가. 대단하지 않은가. 한 아기는 추하게 변하는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실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이시요 왕이시다. 이런 아기가 도대체 인류 역사상 어디에 있었는가. 위대한 성탄의 사건은 베들레헴 구유만이 아니라 낙심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과 가정에서도, 절망으로 짓눌린 이 시대의 교회와 세상에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저 2천년 전 뿐 아니라 지금 이 2020년에도 성탄은 살아있는 이야기이어야 한다. 성탄이란 선물을 언제까지 옆으로 밀어 놓고 살 것인가. 활짝 펼쳐야 한다. 변질을 변화로 바꾸실 분은 성탄의 예수님뿐이시다. 모든 것이 변해 울 기력조차 없는 2020년의 사람들을 기쁨의 사람으로 바꾸실 분은 성탄의 예수님이시면 아주 충분하다.
12.1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