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질문을 할 수도 있고 내가 누군가로부터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그 누군가의 답변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기도 하고 나의 답변을 통해 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질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누군가를 향하신 질문이었지만 그 모든 질문들은 또한 나를 향한 질문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질문을 들어보자. 그리고 답해보자.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을 향해 물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실존을 드러내야하는 질문이다. 나는 지금 도대체 누구며 또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 답변을 해야 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가인은 이미 동생을 죽였다. 그의 답은 너무 뻔뻔했다. 아니 답변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반문을 하였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슬픈 답변, 비열한 답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신다. 인간(人間)은 그 단어 속에 이미 의존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서로 관계라고 불리는 책임이 있고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다. 나의 인간관계는 허물어져 있는지 아니면 바로 맺어있는지 이상한 핑계를 대지 말고 하나님께 올바른 답변을 드려야 한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에게 하나님이 물으셨다. 어려운 가운데 네 삶의 방향은 어디인가를 말해보라는 것이다. 방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은 방향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사격 종목에서 미국의 메튜 에몬스는 눈앞에 둔 금메달을 놓치게 되었다. 다른 선수들보다 확연히 앞선 상황에서 그가 쏜 마지막 한 발이 다른 표적지를 향해 날아갔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느냐?”는 마지막까지 정신 차리고 답해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서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물으셨다. 예수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것에 응답하시려는 따듯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그의 답변은 분명했다. 그리고 간절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나의 소원을 분명이 답해야 한다. 무엇인가 무너진 인생을 향해 던진 하나님의 질문 앞에 내어놓을 간절한 소원이 없다면 딱한 인생으로 계속 살겠다는 어리석은 심사(心思)일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이 질문의 답은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달린 답변이 될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베드로의 답변을 듣고만 있지 말고 나의 선명한 믿음의 고백을 담은 답변을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
“너는 어떻게 감사하고 있느냐?” 예수님은 묻고 계시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나병에서 치유된 은혜를 받고도 감사치 않은 자들을 찾으시면서 질문하시지 않으셨던가. 감사의 달에 나는 분명히 답해야 한다. “너는 어떻게 감사하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11.1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