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비열한 질문 중의 하나는 가인의 질문이었다. 형제 아벨을 시기하여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때 역사상 가징 비열한 가인의 질문이 나왔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죄 없는 형제를 죽여 놓고 오히려 따지듯 묻는 가인의 행태는 비열하고도 간악하다. 죄를 지은 가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그 기회를 외면했다. 가인은 그 때라도 그런 비열한 질문 대신 통회, 자복, 회개했어야 했다. 그는 자기의 죄를 덮기에 급급했고 형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그런 가인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이 임하였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비열한 질문의 주인공 가인은 방랑자가 되었다.
지난 9월 22일 오후 9시 40분, 북한군에 의해 어떤 이유이든지 바다에 표류하던 대한민국 공무원이 사살 당했다. 며칠 뒤 북한의 통지문이 발표되었다. 그 안에 담긴 대단히 미안하다는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은 유감이란 표현이다. 그들이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귀측 군부가 무슨 증거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불법 침입자 단속과 단속 과정 해명에 대한 요구도 없이 일방적인 억측으로 '만행', '응분의 대가' 등과 같은 불경스럽고 대결적 색채가 깊은 표현들을 골라 쓰는지 커다란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다 위의 기진맥진한 민간인을 사살하고도 따지듯이 커다랗게 유감 표현한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열한 유감 표현 중의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상황을 지켜본 우리 군 당국의 보고는 역사상 가장 비열한 핑계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군은 이렇게 말한다. 북한군이 민간인을 그렇게 죽일 줄 몰랐다고도 하다가 감청을 통해 살해할 것을 미리 알았다고도 하는 등 좌충우돌의 보고를 내놓았다. 그런 핑계를 듣자니 어이없다.
지난주일 목양칼럼에 필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얼마나 추었을까요?/ 찬 바다에서/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사랑하는 가족들이/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자기를 건져줄 사람을/ 그는 끝내 그는 그 찬 바다에서 숨졌습니다./ 북쪽에서는 총을 쏘고, 남쪽에서 바라만 보고/ 아무도 그를 구하러 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난 주 한반도 저 북녘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날 그 시간, 그 바다를 지켜본 미상의 비행물체가 하늘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다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그 사람/ 누가 무엇으로 설명하고/ 누가 무엇으로 변명해도/ 우리 모두의 애통과 분노를 가눌 길 없습니다./ 차갑고 무서운 바다 같은 세상에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그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많고, 그들을 구경하는 자들도 적지 않은데/ 그들을 구하러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하늘 하나님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실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남만 지적하여 가장 비열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일이 아니다. 우리도 인류 역사상 가장 비열한 침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3.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