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의 진보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사망은 미국 사회와 법 집행에 있어서 중대한 함의를 갖는 사건이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수 6 대 진보 3이라는 보수 절대 우위의 구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트럼프는 지난 26일 긴즈버그의 후임 대법관으로 강력한 보수성향의 코니 배럿을 지명했으며 배럿이 상원 인준 표결을 통과하면 미국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보수화를 체감하게 될 전망이다(U.S. Supreme Court faces major challenges when it returns without Ginsburg).
임신중단(낙태)을 비롯한 사회적 이슈들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임신중단을 합법화한 이래로, 보수진영은 이 판결을 뒤집으려고 시도해왔으나 늘 역부족이었다. 트럼프가 긴즈버그의 자리에 확고한 보수적 인물을 앉힌다면 연방대법원이 임신중단 권리를 뒤집을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수 연방대법관들은 총기 보유 권리 확대, 개인의 종교적 권리 강화, 투표권 제한 같은 다른 사회적 이슈들에서 훨씬 더 과감한 입장을 취하게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이 의회 다수를 차지해서 기후변화 같은 이슈에 대해 중대한 법안을 통과시킨다 하더라도 보수 우위의 연방대법원이 이 같은 진보적 법안들을 폐기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사형제 폐지 같은 진보적 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더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최근 연방대법원이 6대 3으로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린 것에서 보듯, 상황에 따라서는 다른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
총기보유권리 확대, 개인 종교적 권리강화, 투표권 제한
연방대법원장 중심적 역할 약화, 연방기관 권한 약화
불투명한 오바마케어의 미래
단기적으로는 긴즈버그의 빈자리가 가장 크게 느껴질 재판은 11월 10일에 열린다. 보수 진영에서 오바마케어 법안에 대해 제기한 소송의 구두변론이 진행되는 날이다. 오바마케어 법안은 2010년 시행됐으며, 2012년에 연방대법원에서 5대 4로 법안 유지 결정이 나온 바 있다. 긴즈버그는 다수의견(5명) 쪽에 섰다. 그의 후임자가 이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때까지 트럼프가 지명한 후임이 인준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연방대법원은 보수 5 대 진보 3의 현재 구도 그대로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이번에 연방대법원으로 올라와서 10월 5일부터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또 다른 사건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11월 4일, 연방대법관들은 특정 연방 법률에 대해 종교적 권리에 따른 예외가 어디까지 적용돼야 하는지를 두고 심리를 벌이게 된다. 필라델피아 시는 시 정부가 운영하는 위탁보육 프로그램에서 가톨릭 사회복지 기관의 참여 신청을 금지했다. 이 기관이 (법을 어겨) 동성커플의 신청을 거부한다는 이유에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도 있다. 연방대법원은 12월 2일에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이 제기한 소송을 심리할 예정이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개입을 수사한 로버트 뮬러 특검의 수사보고서를 공개하라고 민주당이 트럼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사건이다.
연방대법원장의 균형자 역할
앤서니 케네디 연방대법관의 은퇴 이후 지난 2년 동안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은 중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트럼프가 긴즈버그의 후임을 지명할 경우 그의 영향력은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체 9명인 연방대법관들 중 이념적으로 가운데 있는 로버츠는 그동안 (자신을 뺀) ‘진보 4 또는 보수 4’ 구도 속에서 어느 한 쪽의 편에 서느냐에 따라 5대 4로 최종 판결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연방대법원이라는 기관과 사법기구의 독립성 수호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로 알려진 로버츠는 주요 판결에서 세 차례 긴즈버그와 함께 진보 편에 섰다.
지난 6월 그는 루이지애나 주의 엄격한 임신중단 규제법을 폐지하는 데 힘을 보탰고, 수많은 ‘드리머(부모와 함께 미국에 불법적으로 입국한 자녀들)’에 대한 보호장치를 폐지하려는 트럼프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도 기여했다.
로버츠는 큰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릴 때면 중재에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더 보수적인 동료 연방대법관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었다.
일례로 지난 7월, 그는 뉴욕 검찰이 트럼프의 금융기록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 반면 민주당 주도의 하원위원회가 비슷한 문서를 확보하지는 못하게 한 두 건의 판결문을 모두 작성했다.
긴즈버그가 사리진 지금, 로버츠는 직접 균형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됐다.
정부기관들에 대한 전쟁
보수 진영과 기업들은 연방기관들의 권한을 약화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으며, 연방대법원은 이미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보수 성향 판사가 6명으로 늘어나면 소위 ‘행정국가(administrative state)에 대한 전쟁’은 확대될 수 있다.
가장 주목할 만 한건 1984년의 기념비적인 판결, 즉 연방법의 적용범위를 해석할 때 법원은 연방정부 관료들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는 판결이 위험에 처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 판결이 번복될 경우, 앞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서 환경 규제나 소비자보호 관련 규제를 도입하더라도 보수 대법관들로 채워진 연방대법원이 이 같은 시도를 제한함에 있어서 훨씬 더 큰 힘을 갖게 된다.
이미 임기 중에 두 명이나 대법관을 지명하는 ‘행운’을 누린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긴즈버그의 후임자로 강력한 보수적 성향인 코니 배럿(48)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배럿에 대한 상원 인준 청문회와 표결 및 공식 임명을 대선(11월 3일) 전에 마친다는 계획이다. 배럿이 최종 임명될 경우 대법원은 보수 6명, 진보 3명으로 보수색이 한층 강해져, 앞으로 임신중지, 총기 소유, 의료보험, 성소수자 권리 등에서 보수적 판결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배럿은 임신중지에 반대하고 총기소유 권리를 옹호하는 보수 성향이다. 모교인 노터데임대에서 법학을 가르쳤으며, 2017년 트럼프에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에 지명됐다. 트럼프는 오래 전부터 긴즈버그 후임으로 배럿을 염두에 둬온 것으로 알려졌다. 배럿이 대법관에 임명되면 미 역사상 5번째 여성 대법관이 된다. 1991년 43살에 대법관이 된 클래런스 토머스 이후 두 번째로 젊은 나이에 대법관에 오르는 기록도 세우게 된다. 남편 제시는 변호사이며, 7명의 자녀 가운데 두 명을 아이티에서 입양했다.
언론은 대법관 임명 문제는 남은 대선 기간에 주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한다. 트럼프는 첫 임기 안에 닐 고서치, 브랫 캐버노에 이어 이날 배럿까지 무려 3명의 대법관을 지명하게 됐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긴즈버그가 숨진 직후부터 “그 자리를 채우라”며 신속한 후임 인선을 주장했다. 배럿이 상원 인준 표결을 통과할 경우, 트럼프로서는 미국의 보수층에게 상당한 레거시(유산)를 쌓게 된다.
10.03.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