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여성도

화란의 위대한 대 칼빈주의자이고 대 설교자, 목회자이자, 대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야기다. 

카이퍼는 25세에 명문 라이덴 대학교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박사(Dr. Theol)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6세에 목사로 안수 받고 시골 베이스트(Beest)교회로 목회하러 갔다. 베이스트교회는 비록 시골교회이지만 설립한지 300년이 넘은 개혁교회였다. 특히 베이스트개혁교회는 칼빈의 종교개혁 신학과 신앙을 제대로 계승한 정통교회였다. 특히 1619년에 돌트총회에서 결정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철저히 믿는 개혁교회였다. 그런데 젊은 목사 카이퍼는 비록 신학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출신의 목사지만 목회는 처음이었다. 

카이퍼는 당시 라이덴 대학교의 신학의 분위기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자였다. 특히 카이퍼의 스승은 당대의 자유주의 대 신학자인 스콜턴(Scolten) 박사였다. 비록 카이퍼의 아버지 얀 카이퍼 목사는 훌륭한 정통신학과 신앙을 가진 목회자였고, 카이퍼는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당시의 라이덴 대학의 자유주의신학의 물을 많이 먹었다. 당시 유럽의 교회는 모두 국가교회로서 인본주의, 합리주의, 계몽주의 사상이 지배하였다. 

카이퍼 목사는 당대의 최고의 칼빈 신학자이자, 젊은 목사로서 첫 설교는 당당하고 웅변적이었다. 하지만 그 교회 성도들은 카이퍼 목사의 설교에 냉담했다. 카이퍼의 첫 목회는 큰 시련이 다가왔다. 특히 당시에 젊은 여전도회 회원 가운데 발투스(Baltus)란 분이 있었다. 발투스는 철저한 전통적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 교회 모든 성도들은 모두가 역사적 개혁신학을 지키는데 똘똘 뭉쳐있었다. 

카이퍼는 예배 후에 성도들과 악수례를 했다. 그러나 발투스만은 목사의 손을 거절했다. 목사로서 카이퍼는 참으로 민망하고 속이 상했다. 카이퍼는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카이퍼는 드디어 발투스의 댁에 심방을 갔다. 하지만 발투스는 카이퍼 목사에게 싸늘하고 냉담했다. 하지만 카이퍼 목사는 인내를 갖고 계속해서 대화의 물고를 트자, 발투스는 카이퍼 목사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카이퍼 목사님! 우리들은 카이퍼 목사님의 설교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목사님의 신앙사상은 칼빈의 역사적 개혁주의 정신과 맞지 않은 현대자유주의자의 사상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님이 철저한 칼빈주의 사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평신도가 박사 목사에게 당돌하게도 목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발투스의 지적대로 카이퍼 목사의 설교가 현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고 지적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도전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사가 평신도의 충고를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카이퍼 목사는 겸손하게 그 자리에서 발투스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카이퍼 목사는 발투스의 진심어린 충고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설교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 

물론 카이퍼는 박사학위논문으로 ‘칼빈과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 연구’란 제목으로 썼다. 그래서 카이퍼는 당대에 칼빈 연구의 대가였다. 이미 그는 학생시절에 ‘칼빈과 라스코’라 논문으로 당대 최고의 금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카이퍼는 칼빈 연구의 대가였지만 칼빈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카이퍼는 합리적이고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사상에서 돌아서서 정통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지금도 세계 많은 학자들 가운데 칼빈 연구의 대가들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그냥 학문적으로 칼빈의 개인과 그의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많다. 목사님들 중에도 설교 때마다 칼빈을 말하거나 개혁주의를 외치는 중에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분들도 더러 있다. 결국 카이퍼 목사는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의 여성도의 충고를 듣고 정통 칼빈주의 사상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카이퍼는 19세기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카이퍼는 ‘평신도가 말하는 충고’로, 목사는 복음 곧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라는 역사적 개혁주의 사상으로 돌아섰다. 그의 칼빈주의 사상은 칼빈의 신학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였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은 교회당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칼빈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당대의 명문 라이덴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 소지자인 카이퍼 목사에게 당당히 진심으로 충고했던 발투스를 생각해본다. 카이퍼는 그의 일생 동안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충고를 해주었던 발투스를 끝까지 잊지 않았다. 여성도의 충고를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카이퍼를 하나님께서 마음껏 높이시고 크게 쓰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복음에서 멀어진 설교, 자율주의적 설교, 심리적 설교, 비성경적 설교, 인본주의적 설교, 자유주의적 설교에도 아무 탈 없이 잘 넘어가는 것이 참으로 걱정이다. 목사님들은 성도들에게 언제나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여, 자신의 사상과 경험에 동참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곧 부흥이고 성공이라고 우기고 포장한다. 

교회는 말씀과 성령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가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젊은 여성도 발투스의 충고를 듣고 철저한 개혁주의자로 방향을 바꾼 아브라함 카이퍼 목사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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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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