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반대말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대부분 쉽게 대답할 것이다. “미움”이라고. 아니다. 틀렸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15세 때에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되었다가 홀로 살아남아 평생을 기자, 작가, 교수로서 평화와 인권을 위해 살았던 유대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이렇게 말했다. The opposite of love is not hate, it's indifference(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다). 노벨 평화상도 받았던 엘리 위젤은 현대 사회를 황폐케 하는 최고의 악이 무관심이라고 했다. "침묵은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죄악"이라며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무관심에는 맞서야 한다"고 외쳤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팔짝 팔짝 뛰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위치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적절한 책임이 있음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다. “무관심의 절정”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작품으로서 철학자 필리프 프티와의 대담을 싣고 있는 책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이 있다면 무관심이요, 이 땅에 가장 큰 죄악이 있다면 다름 아닌 무관심이기에 그의 책 제목, “무관심의 절정”은 이 시대를 대변하기에 매우 시의적절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깊은 탄식도 여기에 있으셨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7). 무엇을 해도 도무지 반응이 없는 무관심에 대한 강한 질타이시다. 그 뿌리 깊은 죄악과 질병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도져서 하나님께도, 교회에도, 이웃에도, 이 세상에도, 다음 세대에도 오직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제외한 모든 일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그야말로 무관심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무관심하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의 고난도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끝없는 관심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축복과 앞으로 누릴 유업과 영생을 가져다주신 것이다. 

고난주간이다. 예수님이 나를 위한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한 죽음의 길을 걸으신 고난의 여정을 묵상하며 지나는 시간이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이리저리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 주간을 보낼 수는 없다. 예수님의 끝없는 관심과 죽으시기까지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고난주간을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의 절정”으로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인 “무관심”으로 고난주간을 지날 수 없다. 이제, 예수님께 관심을 갖자.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에 나도 관심을 갖자. 가족에도, 우리 주변에도, 관심을 갖자. “무관심의 절정”이 아닌 “관심의 극치”로 살아보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자. 어디선가 들리는 듯 하지 않는가?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하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하느냐”

 

04.0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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