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시작한 폐렴 바이러스가 이제는 한국에도 창궐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으로부터의 입국자들을 막는 일이 확산되고 있지만 전염병에서 안전한 나라는 세계 아무 곳도 없다.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의학적, 사회적, 경제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이 있겠고 영적인 관점도 여럿이 있겠으나 이 상황을 “미래(未來)의 현존(現存)”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역사가 끝나고 영원한 미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온 인류는 그것을 알든 모르든 지금 “이미”와 “아직”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미래는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 그 구원과 심판이 “이미” 현재에 들어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과 심판이 현존에 담겨 있는 모습을 설명하기에 영어의 “appetizer”보다 한국의 “맛보기”가 더 잘 와 닿는다. 그렇다. 천국의 맛보기와 지옥의 맛보기가 엄연(奄然)히 현존한다. 이 세상에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히 천국의 “맛보기”이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13-14)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신다고? 그렇다. 찬송으로 천국의 현존, 천국의 맛보기를 이렇게 노래한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구원의 현존은 가득하다.
고통을 호소하며 여기저기서 쓰러지고 죽는 모습은 영원한 심판의 현존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행동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냈기 때문이니라 하시기로”(예레미야 25:15-16) 심판의 현존 가운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땅의 필요한 논리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되 무조건 순응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현존으로서의 이 땅의 고통을 바라본다면 주일예배를 포기하고 기도회를 걸어 잠글 일만은 아니다.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역대하 7:13b-16). 하나님은 전염병이 있을 때 피해 있으라고 하지않으셨다. 오히려 성전에 모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고통의 현실 가운데 있는 한국 교회.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이민 교회에 있는 당신이 직접 당하지 않으니....” 라는 비난도 들을 수 있겠다. 그렇다. 극심한 어려움을 직면할 때 나의 결정이 나를 두렵게 할 것 같다. “현실의 미래”를 논한다면 일단 힘든 현실에서 피해야 옳겠다. 그러나 “미래의 현존”으로 이 땅을 바라본다면 교회가 걸을 길, 교회가 외칠 메시지는 따로 있음이 분명하다. 사랑하는 한국교회와 고통 받는 온 땅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02.2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