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저울에서 손 떼는 리더가 되라!

리더십저널, En-Gedi Resource Center, 로이스 티어베르

주전 120년경 초기의 랍비 현자 축에 드는 예호슈아 벤 페라키아는 이런 지혜의 말을 했다. “각 사람을 그들에게 가중 조절된 저울로 판단하라.” 이 말을 들으면 옛날 시장에서 상인이 양팔 저울의 한쪽 접시에 곡식을 부어 무게 추를 얹은 반대편 접시와 평형을 맞추던 광경이 떠오른다. 마음씨 좋은 가게주인은 접시가 균형점을 넘어 기울 때까지 덤을 얹어준다. 즉 랍비의 말은 남의 행위를 너그러운 편으로 ‘가중조절’하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면 상대방에게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의 행동 이면에 숨은 호의(혹은 악의)를 찾아낼 수 있다. 다른 이의 동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 반응이 크게 달라진다는 의미다. ‘우호적 판단’을 하려고 습관적으로 노력했을 때 더 친절하고 오래 참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주변 사람에 대해서도 최악이 아닌 최선을 기대할 때 우리 태도는 더 다정다감해진다.

 

부정적 판단의 모습들

 

부정적 판단은 상대방에 대해 최악을 상정하는 것이고, 이런 태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늘 비판적이고 불평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은 가는 곳마다 부정적인 것을 찾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가트맨은 수천 쌍의 부부와 면담하면서 어떤 결혼이 지속하고 어떤 결혼이 실패했는가를 추적했고, 그 결과를 토대로 관계가 심각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무대로 말발굽 소리를 내며 등장하는 ‘4대 재앙’이 있다고 발견했다. 바로 방어성, 벽 쌓기, 비난, 경멸이다. 이 중에 다른 것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 바로 ‘경멸’이다. 이 독한 감정은 모욕, 욕설, 비아냥, 조롱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가트맨이 정의한 ‘비난’은 상대방의 죄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당신은 이기적이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아이들에게 못되게 굴어요.” 그러나 비난보다 훨씬 나쁜 게 경멸이다. 경멸은 죄를 폭로할 뿐 아니라 죄인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경멸은 정죄의 최종 결과물이며, 상대방에게 무자비한 판단을 해왔던 세월에서 비롯된다.

 

판단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어떻게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죄를 분별할 수 있을까? 예수님 시대보다 수십 년 앞서 살았던 힐렌의 혜안은 이렇다. “당신 자신이 그 처지가 되기 전까지는 동료를 판단하지 말라.” 우린 남의 죄는 분별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인생역정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사람은 행위로 드러난 죄는 분별할 수 있겠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의 온전한 동기를 아신다. 

우리는 외적 잘못을 분별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만 의사봉을 내리치며 그 인격 전체에 하나님의 정죄를 선포할 자격은 없다.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4:5).

 

너와 똑같다

 

‘우호적 판단하기’가 현명한 발상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호적 판단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전제하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판단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이 죄인이고 나 또한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을 토대로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설파하신 으뜸 계명을 듣는다.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당신과 이웃, 공히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지만 또한 둘 다 죄를 범한 자들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최선을 염두에 두고 우호적으로 판단하라”는 뜻보다는 “네가 죄인임을 너도 알고 있으니 자비롭게 판단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내가 남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남의 속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유일하게 아는 마음은 죄악으로 가득한 내 마음이다. 고로 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자비를 베푸시기 원한다면, 나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02.22.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