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소통방식은 말(言語)이다. 때로 감(感)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할 수도 있지만,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대화를 나누어야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 한국의 청문회를 통해 말이 어떻게 오고가는지를 보았다. 이런 싸움은 정치판에서만이 아니라 사실 아이들이 사회성을 처음 배우는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닌가. 거칠고 강렬한 공격과 교묘하고 위선적인 수비가 부딪치는 가운데 말다툼은 끝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며 자랐다. 이 싸움은 단순한 언어싸움이 아니라 각자의 자존심과 명예와 나아가 존재성을 건, 사실상 전투이기 때문에 한쪽이 완전항복을 하고 무릎을 꿇든지 어느 쪽이 죽음에 이르기까지든 계속되는 원리를 갖고 있다.
말에 대한 속담과 격언은 너무도 많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속담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실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고, 틀어지고, 미워하는 적을 만들어낸다. 또한 버리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나의 그것‘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회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서로가 수많은 적군들이 되어 긴장대치상태로 살아가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서는 토라를 소리내어 읽는다. 몇 차례 방문해본 회당의 집회에서 어린아이와 나이든 랍비가 함께 토라를 읽는 모습을 기억한다. 한국의 국어수업이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로 나누어졌을 때 기대를 했었다. 국어책에 밑줄 그어가며 품사를 외우고 문장구성 형식을 배웠지만 정작 말하는 법을 가르쳐준 교육이 없던 국어시간에 말하기를 따로 배우고, 듣기와 쓰기 읽기도 가르쳐 주겠구나 기대했었다. 그러나, 가끔 시나 시조를 배울 때나 책 읽는 소리가 날 뿐, 여전히 글 속에 묶인 국어교육은 며칠간 바라본 청문회와 같은 삶을 사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한국 초등학교 아이들의 자기 소개말을 들어보자. “햇빛초등학교 4학년 3반 홍길동입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의 억양고저가 얼마나 닮아있는지. 또한 사춘기를 지나며 청소년기에 접어든 학생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듣고 있기에 민망할 정도의 비속어와 욕설이 오갈 뿐 언어다운 언어는 물론 단정하게 정리된 문장으로 말하는 대화를 들어보기 힘들다. 그러면 성인들의 언어는 괜찮은가? 대상없는 화풀이 언어와 유머라며 던지는 조롱의 언어,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독(毒)언어로 가득한 사회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이렇게 된 원인 중의 하나를 책읽지않는(朗讀不在) 현상에서 찾아본다. 미국 초등학교 수업을 참관하며 발견한 것이 ‘크게 소리내어 읽기(Read Aloud)’라는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크고 정감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책을 읽어주고, 학생들도 큰 소리로 책을 읽도록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보면서 오래전 아나운서로 입문했을 때 들었던 선배의 교육이 떠올랐었다. “가장 좋은 방송은 얼마나 원고를 잘 읽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원고없이 말하듯 전달하는가이다.” 그 후에야 호흡법, 발성법, 문장의 이어짐, 인터뷰 방법 등 언어기술을 교육받았었다. 말하는 가술 이전에 말하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교육이었다.
언어는 공격언어와 수비언어로 나누어야하는 싸움기술이 아니다. 성경은 외치는 언어(선포)와 고백의 언어(기도) 그리고 올려주는 언어(對人관계) 그리고 높여드리는 언어(찬양)를 통해 대화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한 가지, 듣는 언어(침묵, 묵상)를 강조해주고 있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중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는 개그맨, 공감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특강 강사들, 때론 청산유수같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네 아저씨나 한 주제로 몇 시간을 즐거워할 수 있는 여성들의 대화들 모두 말 잘한다는 평가를 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나, 정말 말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말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상대방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첫 번째 조건은 공감(共感)이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는 감정이입(empathy)인 동시에 동정심과 연민과 동의하는 마음(sympathy)까지를 뜻한다. 왜 청문회와 같은 자리가 전투장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가? 공감을 위한 말이 아니라 공격을 위한 말만 쏟아내기 때문이다. 왜 대화할 친구가 없는가?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기보다는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는 요구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창세기 마지막 50장에서 말하기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죽이려했고 결국 외국상인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을 눈앞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두려움에 떠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분노의 복수의 말을 해야 할 때 용서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는 것, 적어도 우리가 소리나 내는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이라면 요셉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비열한 농담을 하면서 유머라고 착각하지 말고, 조리 있는 항변을 하면서 정직하다 자위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는 값없이 은혜 받은 자의 겸손과 감사에서 우러나는 존중과 사랑의 언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마침내 공동체로서의 한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눈빛에서도 사랑이 흘러내리는 대화를 하시던 광야와 호숫가를 거니시던 예수를 만나러가자.
09.14.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