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웠던 긴 여름이 지나고 이제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다. 자녀들이 학교로 돌아간다. 학교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왁자지껄 소리와 함께 거리거리를 메울 것이다. 이들 중에 가장 흥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려고 집을 떠나는 친구들일 것이다. 자녀를 떠나보내는 부모의 착잡하고도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이것저것 가져갈 것을 챙긴다. 캠퍼스로 첫 발을 딛는 우리 자녀들이 꼭 챙기는 것 중에 최우선 물품은 무엇일까? 확신컨대 스마트폰일 것이다. 다른 것 다 놔두고 가도 스마트폰을 두고 가는 친구들은 없을 것이다. 그 외에 기본적인 옷이나 신발, 자신이 선호하는 샴푸나 베개 등을 짐 보따리에 집어넣는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가만 보니 그 중요한 것을 챙기는 자녀도 또 꼭 챙겨주려는 부모도 찾기 쉽지 않다. 그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분별력이다. 이것이 없이 빚어질 일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선악의 기준이 사라진 캠퍼스에서 분별력 없이 다른 짐들을 껴안고 있은들, 이런저런 사상과 유행 속에 휩싸일 우리 자녀들의 앞날은 참담할 것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기도했다.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이 기도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와 함께 온갖 좋은 것을 선물로 주셨음은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준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선택의 하루를 시작한다. 눈 뜨고 맨 처음 무엇을 해야 할지. 아침식사로 무엇을 먹을지, 오늘의 드레스코드로 무엇을 취할지.... 짧은 하루에도 선택해야 할 것은 수십 개가 넘는다. 잔잔한 일상의 선택 외에도 무엇을 전공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역이민(逆移民)을 해야 할지, 생애를 바꿀 선택들도 여럿 있다. 분별력이 없다면 우리의 하루와 우리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일 것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선택도 있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팥죽 사이에서 팥죽을 선택했다. 그리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 선택 이후 그와 그의 후손이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안다. 마틴 루터 킹은 침묵과 외침 사이에서 외침을 선택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I have a dream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of Georgia,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라고 이어지는 담대한 외침을 듣는다. 죽음의 값을 치른 그의 외침을 진정한 현실로 바꾸려고 많은 이들이 분투하고 있음도 본다. 지도자의 분별은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분별없이 덥썩덥썩 선택하는 지도자 때문에 죽을 맛을 보고 또 보는 가련한 백성들도 있지 않은가.
분별은 분명히 선택에 앞서야 한다. 이 세상에 분별없이 선택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분별이란 단어는 누구나 사용한다. 무엇이 그 분별의 기준인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 생각, 내 경험, 내 감정이 분별의 기준이다, 어쩔래?”하는 사람에게 무어라 말하겠는가. 우리의 분별의 기준은 확연히 다르다. 그 분별의 기준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면 좋은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쁘면 나쁜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이 분별의 유일한 기준이다. 캠퍼스로 가는, 학교로 돌아가는 우리 자녀들이 꼭 챙겨야 할 것은 바로 이 분별력이다. 물론 우리 부모들도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들도 꼭 챙겨야 할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온한 마음을 주옵소서. 우리가 변화시켜야 하는 것들은 우리가 그것을 바꿀 수 있도록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이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08.3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