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살라”는 말은 들어 보셨어도 “잘 먹고 잘 죽으라”는 말은 못 들어 보셨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잊지 못한다. 1989년, 30년 전이다. 내가 속한 노회에서 강도사 인허(認許)식과 목사 임직식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강도사 인허를 받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때 들었던 설교 말씀은 이렇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주는 밥을 먹는 자들입니다. 그 밥을 잘 먹고 잘 죽으십시오. 여러분이 밥을 먹는 이유는 교회를 위해서 죽으려고 먹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은 나는 향후(向後) 밥을 먹을 때마다 밥을 먹는 이유를 되뇌이며 먹으려 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 장렬(壯烈)하게 죽으려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살아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순교자(殉敎者)도 아니다. 늘 교회 밥을 먹으면서도 교회를 위해 죽을 생각이 안 났는지, 애써 교회를 위해 죽을 생각을 안했기 때문이리라.
“잘 먹고 잘 죽으라”는 말씀이 선명(鮮明)히 생각날 때가 있다. 각양(各樣) 임직식을 참석할 때이다. 회중석에 앉아 있을 때는 그 말씀을 생각만 하지만 설교나 축사 등을 할 때에는 직접 권면하기도 한다. “잘 먹고 교회를 위해 잘 죽으시라”고. 어떤 임직자들은 눈물로 듣는다. 어떤 임직자들은 당혹스러워 한다. 어떤 임직자자들은 무덤덤한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당사자(當事者)도 아니건만 “임직자들이여, 잘 먹고 교회를 위해 잘 죽으시오” 라는 말에 힘주어 “아멘” 한다.
내가 30년 전 들은 교회를 위해 잘 먹고 잘 죽으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죽으라는 말씀임이 분명하다. 또한 자기 교회 성도를 위해 죽으라는 말씀이요, 자기 교회 목사님을 위해 죽으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임직자가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직분자가 된 후, 점점 자기 목사님을 대적하는데 앞장 서는 자가 되서야 되겠는가. “목사님은 가까이 하지도 말고 멀리도 하지 말자”며 목사님과 그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면 되겠는가. 그것은 직분자의 자세(姿勢)도 아니고 도리(道理)도 아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이어간다. 한 결 같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요 바울의 지근(至近) 거리에서 눈물겨운 신실함으로 동역한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시라.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 놓았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자기들을 목양하는 바울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직분자들이 속으로 “난 그리스도와 성도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지만 목사님을 위해서는 결코 아니야” 라고 생각한다면 언젠가 그 품은 마음이 드러날 것이다. 직분자가 자기를 목양하는 목사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성도들도 곧 자기들의 목사님을 천시(賤視)하는 대열에 합류하지 않겠는가.
나는 확신한다. 직분자는 예배를 사수(死守)하고, 성도를 사수(死守)하고, 목사를 사수(死守) 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사수(死守)가 무슨 뜻인가.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다. 참된 직분자들이라면 이 셋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분리할 수도 없다.
맞다. 목사도 잘 먹고 교회를 위해 잘 죽으려하고, 직분자들도 잘 먹고 교회를 위해 잘 죽으려 한다면 그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교회를 위한 죽음이 목적이 되는 목회자, 교회를 향한 죽음을 목표로 삼는 직분자가 함께 있는 곳에는 교회의 주도권(主導權)을 위한 싸움이 있을 수 없다. 그 곳에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
07.27.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