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 필자가 사는 뉴욕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연합집회가 있었다. 감동도 컸고 아쉬움도 있었다. 오랜 전통을 잘 계승하려는 분들의 진지한 수고와 그 성실한 내용이 귀하였고 그에 걸 맞는 동참이 상대적으로 적은 아쉬움이었다. 뉴욕만이 아니라 수많은 지역에 연합모임이 있다. 그렇지 않은 지역도 많이 있겠지만 더 많은 이들이 말할 것이다. 연합모임이 옛날과 다르다고. 교회 연합은 어려운가? 교회가 하나 됨은 지난(至難)한 일인가?
누구나 알고 보았듯이 어렵다. 힘들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 연합이요 하나 됨이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 일컫는 교회의 존재론적 이유도 있고,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라고 기도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애절한 마음을 알고 있다면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교회들은 연합되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말씀에 시비를 걸자가 누가 있겠는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나 됨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말씀의 요청임에도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을 일구지 못함은 무슨 연유인가? 하나 됨의 기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오랜 또는 신선한(?) 행사의 이름만을 치켜세우고 그 깃발 아래 다들 모이라고 외치니,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 받고 모인 자들도 곧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연합을 요청하는 상황이 지역이나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수님이 하나 됨의 기준으로 세워주신 “진리”가 아니고서는 그 어떤 연합도 연합이 아니다.
진리만이 시대를 관통한다. 진리만이 모든 이의 마음을 묶을 수 있다. 진리는 무엇보다 먼저 회개를 부른다. 연합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았던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통곡하게 한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영원한 것들에 대한 자복을 진리는 앞서 자아낸다. 연합의 깃발은 그것을 들고 있는 자신들은 물론, 여기에 참여를 원하는 자들의 마음이 먼저 하나가 될 공감대를 갖게 하고 그 다음에 주어진 연합의 일들에 눈을 들게 함이 순서임이 분명하다. 믿는 자의 연합이 어찌 인간의 노력 위에만 세워지겠는가. 진리가 은혜로운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연합에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는 점점 축소되고 인간의 노력 이야기만 자꾸 커지면 그 자체가 진리로 하나 됨에 역주행하는 것이다.
연합 모임을 주저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면 연합이 모임과 함께 끝나는 일이 적지 않게 때문이 아니겠는가. “혹시나” 해서 왔는데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들 속에 또 다른 시간의 연합모임에 나올 걸림돌들을 차곡차곡 세워두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무리 명분이 커도 미래를 바꿀 변화를 만들지 못하는 연합에 계속 시간을 쏟을 인내(?)의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연합이 약해지는 가운데 놀라운 일을 본다. 어떤 상황에도 연합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저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연합 외에는 적당한 실망이 없는 연합이 이 땅에서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부지런히 연합에 참여하여 오히려 연합의 부족한 한 모퉁이를 작게라도 붙잡고 있다.
그렇다. 연합은 복음의 명령이요, 그 모습 자체가 복음이다. 격려가 없어도, 외면이 있어도, 각 지역에서 그리고 그 지역을 뛰어넘는 연합에 묵묵히 수고의 땀을 흘리는 분들이 주님의 기쁨이 됨을 확신하며 우리의 든든한 위로가 됨을 고백한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07.20.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