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직접 은사를 주신다. 또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직분을 주신다. 다양한 은사를 주시고 여러 직분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은사와 직분은 귀하고 아름답다. 은사와 직분이 어울리면 가장 좋다. 은사가 없는 직분은 큰 아쉬움을 자아낸다. 은사도 없는데 억지로 직분을 맡기면 본인도 괴롭고 보는 이도 힘들다. 성경에는 그리고 세상에는 빛나는 참모(參謀)가 많다. 그것이 그들의 은사이며 공동체의 복이다. 리더의 은사가 없는 사람에게 리더의 직분을 주면 그 직분의 기간 동안 머리 아플 일이 많다. 그 직분이 항존직일 경우는 매우 심각하다.
직장생활을 효과적으로 잘 하던 사람이 누가 부추겼는지 자신이 사장 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는지 덜컥 자기 사업하다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일이 왜 한둘이겠는가. 직분이 없는 은사도 있다. 직분이 없는 은사는 때때로 공동체에 위험을 안기거나 정반대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내게 예언의 은사가 있으니 내 말을 잘 들어라, 내게 신유의 은사가 있으나 나를 알아 모시라”는 교만의 헛기침은 직분도 없지만 은사도 없는 사기(詐欺)일 경우가 농후(濃厚)하다. 직분은 없지만 은사로 그 공동체를 따뜻하게 감싸는 사람도 적잖이 있다.
기독교 아동문학가로 살았던 권정생 작가의 작품 “몽실언니”는 그 이름이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면서, 나의 어린 소녀 몽실일 뿐인데 오히려 생부(生父), 생모(生母), 계부(繼父), 계모(繼母), 그리고 친동생, 이복(異腹) 동생을 다 품는 것을 물론 한국 전쟁의 아픔까지 다 가슴에 담아내는 모습을 보인다. 직분은 없지만 모든 이의 어른 같은 나의 어린 소녀 몽실언니는 직분 없는 은사의 감동을 보여준다. 둘러보면 교회 안에 직분은 없어도 주님과 교회를 묵묵히 잘 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마치 빈 상자처럼 여긴다.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의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Gift of Love"인데 그의 친구와 그 친구의 어린 딸 이야기였다. 어느 날 친구가 그의 어린 딸이 황금색 포장지를 낭비한다고 혼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딸이 그 다음날 황금색 포장지로 싼 상자를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그 선물상자를 받아 열어본 친구는 “이게 뭐냐”며 또 딸을 혼내주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자는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딸이 말한다. “아빠, 그 상자는 비어있는 것 아니어요. 내 사랑의 키스를 가득 불어 담은 것이어요.” 친구는 딸에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는 글이다. 그렇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이와 같다.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는 것 같이 얼마나 무시하는가. 성령의 루하흐(바람)로 가득 찬 은사, 사랑의 선물상자를 외면한 무례(無禮)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교회가 직분자를 세울 때 쉽지 않다. 지명을 할 때도 그렇고 선거를 통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 직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고 지명을 할 때는 목사님이나 당회가 사사(私事)로이 세우는 줄로 알거나 선거를 할 때는 교인들의 인기투표로 착각(錯覺)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사가 이미 풍성하고 이미 받은 직분도 귀하거늘 마치 어떤 한 직분에 자기의 모든 것이 달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직분은 그 직분을 맡은 자의 사려 깊은 생각을 요청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직분을 생각해야 한다. 내 중심으로 직분을 생각하면 교만에 빠지거나 시험에 빠진다.
은사와 직분은 애당초 나의 것이 아니다. 결단코 교회로부터 출발한 것도 아니다. 유일한 근원(根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은사와 직분의 아름다운 조화를 통해, 혹 직분은 없더라도 겸손히 주어진 은사를 통해 묵묵히 섬김의 일을 끝까지 감당한다면 은사와 직분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교회와 세상은 얼마나 많이 바뀌겠는가.
05.1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