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이한 사정으로 아기를 맡기는 ‘베이비박스’(baby box)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베이비박스가 아기를 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영아유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긴급 구호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실적으로 아기를 맡길 수 있는 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베이비박스가 길에 버려지는 아기를 살리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는 23일 제1소회의실에서 ‘베이비박스 설치 및 지원을 위한 조례제정’ 공청회를 열었다.
발표에 나선 양승원 (재)주사랑공동체 사무국장은 “베이비박스는 부모의 불가피한 사정이나 위기 임신과 아기의 장애, 출생신고 사각지대 등의 이유로 유기 위험에 노출된 아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생명보호 장치”라고 정의했다.
베이비박스는 집 벽을 뚫어 공간을 만들고 문을 설치한 뒤 버려지는 아기가 박스 안에 놓이면 집안에서 벨 소리를 듣고 데려올 수 있게 설계됐다. 아기를 두고 가는 순간 벨이 울리며 상담원이 나가 상담을 진행한다. 맡겨진 아이 중 17%는 원가정(친부모품)으로 복귀하고, 17%는 출생신고 후 입양절차를 밟는다. 나머지 66%는 복지시설로 가게 된다.
공청회에서는 편지와 함께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두고 간 엄마의 행동을 영아유기로 볼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 소개됐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13일 영아유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아기를 데려간 교회는 항상 직원이 상주하고 있었다”며 “A씨도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이탈한 것이 아니라 담당자와 상담을 통해 맡긴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검사 역시 항소를 포기하면서 A씨에 대한 무죄가 확정됐다.
이에 대해 연취현 변호사는 “베이비박스가 영아유기를 조장한다는 오명을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제공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아유기 조장 지적에 대해선 “베이비박스 합법화를 반대하는 아마 거의 유일한 근거가 아닐까 싶다”며 아동복지법 제15조 제2항을 들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 이외의 자가 보호 대상 아동을 발견하거나 보호자의 의뢰를 받은 때에는 지체 없이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에게 보호조치를 의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연 변호사는 “제3자를 통해 보호를 의뢰한 보호자를 영아유기로 처벌하는 것은 법률적 미비나 법의 모순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배지연 대전세종연구원 전 연구원은 베이비박스의 과제로 개별 서비스와 전문 상담, 미혼모·한부모가족·위기 임신 지원단체와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국가 차원의 ‘위기 임신·출산 지원센터’ 설치를 요청했다.
박리현 한국가온한부모복지협회 대표는 “임산부는 건강한 출산을 하고 생명은 태어나야 한다”며 “어쩌면 베이비박스는 위기에 빠진 임산부와 태아를 위한 마지막 선택지”라고 주장했다.
토론자로 나선 김용헌(세종대 석좌교수) 변호사는 “이번 공청회에서 나아가 조례 제정, 미혼모 지원센터와 영아 임시보호센터 설치까지 순조롭게 성사되길 기원한다”고 밝혔다.
행사를 주최한 송창권 제주도의원은 “베이비박스 설치에 대해 아직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생명 살리는 일을 주저해선 안 된다”며 “아동안전과 인권증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6년 경기도의회는 베이비박스 운영단체를 지원하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영아유기 조장 논란 등으로 보류됐다.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 목사는 2009년 12월 서울 관악구 교회 담벼락에 국내 최초로 베이비박스를 설치해 현재까지 약 2000명의 위기 영아의 생명을 보호했다. 또 미혼모가 아기를 키울 수 있도록 양육 꾸러미와 생활비 및 병원비, 주거, 취업 등 400여 명의 가정을 3년간 무상 지원하고 있다.
2012년 8월 입양특례법 개정으로 아이를 입양기관에 등록하기 어려워지면서 늘어난 영유아 유기의 대응책으로 베이비박스의 필요성이 거론된다. 현재 독일과 체코, 폴란드 벨기에 미국 캐나다 프랑스 중국 등도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고 있다. 경기 군포 새가나안교회도 베이비박스를 운영 중이다. 주사랑공동체교회는 제주 베이비박스 설치를 위해 건물의 구조변경을 진행하고 있다.
09.0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