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즉불통 불통즉통(通卽不痛 不通卽痛)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통즉불통 불통즉통”이란 무슨 뜻인가? 몸의 기혈이 통하면 아프지 않고, 몸의 기혈이 막히면 아프다는 뜻이다. 이는 허준의 동의보감 잡병편(雜病篇) 제 1권 용약(用藥)에 나오는 말이다. 한의학 용어인 이 내용은 비단 신체뿐만이 아니라 세상만사에 다 적용된다. 이를테면 공기는 통해야 신선해진고 물도 순환되어야 썩지 않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소통(Connection)이 얼마나 중요한가? 서로 통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고 후에는 부딪치게 된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끼리 관계가 파괴되고 불통(Disconnection)되면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소통의 문제는 개인을 넘어서 축구 같은 구기 종목, 지휘자를 중심으로 한 오케스트라 대원들, 전쟁터에서의 군인들 등 모든 분야에 요구된다. 우리는 지난 3년간 COVID-19로 인하여 꽉 막힌 세상에서 살았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지금 코로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해도 세상은 닫힌 곳이 너무나 많다. 목회나 선교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통즉통(不通卽痛)인 삶의 현장을 통즉불통(通卽不痛)의 사회로 만들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1. 대몸관계

 

B.C. 239년 중국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주도하여 편집한 백과사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이런 글이 있다. “무릇 사람은 삼백육십 개의 마디와 아홉 개의 구멍과 오장과 육부가 있다. 피부는 조밀하기를 바라고, 혈맥은 통하기를 바라며, 정기는 운행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면 병이 머물 곳이 없고, 추한 것이 생겨날 근거가 없게 된다. 병이 머물고 추한 것이 생겨나는 것은 정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우리가 병을 치료한다고 할 때의 ‘치(治)’는 물수변이 있다. 이는 물길을 다스린다는 ‘치수’라는 말에서 왔다. 무릇 생명에는 흐름이 있다. 이 흐름에 변화가 생겨 순조롭지 못할 때 병이 나는 것이다. 만일 흐름이 완전히 막히면 생명체는 죽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기혈(氣血)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체력관리를 잘해야 한다. 동양의학에서는 무병장수(無病長壽)의 첩경을 3쾌로 말한다. 그것은 쾌식(快食) 쾌면(快眠) 쾌변(快便)이다. 여기서 쾌(快)의 의미는 “쾌할 쾌, 빠를 쾌”로서 기쁨의 의미와 함께 막힘이 없이 빠르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한마디로 통즉불통 (通卽不痛)을 강조함이다.

 

 

2. 대신관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과 소통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소통은 생명이고 불통은 죽음이다. 죽음이란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아담-하와가 함께 한 소통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절대적 말씀을 거역함으로 죄가 시작되었다. 그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면전에 설 수 없게 했으며 고통을 가져왔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1-12). 이로써 인간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통(通)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인간이 창조주와의 관계회복을 의미한다. 아무튼 언약백성이 하나님과 단절되면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다. 그 사례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 바로 신, 구약의 중간기인 400년간이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묵시를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칠흙같은 영적 암흑시대가 된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이 힘들어도 뭔가 소망이 있으면 헤쳐 나갈 수 있다. 허나 앞이 안 보이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신(神)과의 단절은 이처럼 무섭다.

통즉불통 (通卽不痛): 통하면 고통이 없다.

불통즉통(不通卽痛): 통하지 않으면 고통이 있다.

창조질서를 포함해 세상 만물의 이치는 서로 통(通)하게 되어 있다.

 

3. 대인관계

 

인간은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이기도 하다. 사회적 존재란 ‘너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뜻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간의 삶은 ‘나’와 ‘너’의 만남의 연속이다. 아기가 태어나 처음 만나는 ‘너’인 엄마를 시작으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너’를 만나게 된다. ‘너’로 인해 행복해하기도 하지만 그들 때문에 상처받고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로 인하여 비로소 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소통을 수단으로 한다. 오늘날 세상에는 마음이 흐르지 않아서 고통과 불행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부부간, 부자간, 형제간 등 가까운 사이일수록 관계가 단절되면 그 아픔은 배가 된다. 불통의 주된 원인은 이해와 관용과 사랑의 부족 때문이다. 다른 표현을 들자면 타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적 사고(思考)의 부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틴 부버가 언급한 대로 '나-너'의 근원 어에 바탕을 둔 진솔한 대화(Dialogue)로 나아가면 어떤 막힌 담이라 할지라도 헐게 되며 나아가 서로 간에 아픈 생채기를 치유하고 관계의 단절도 속히 회복할 수 있다.

 

4. 대물관계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 인간의 타락은 이렇게 자연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세상의 생태환경은 서로 통하게 되어있다. 예를 들면 물은 그 순환에 있어서 신비롭다. 물은 증발할 때 염분과 불순물이 제거된 후 기체로 변한다. 만약 물이 정제되지 않은 채 증발하여 비로 내린다면 지구에는 대재앙이 오고 말 것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사멸을 의미한다. 이렇듯 피조세계는 보이지 않는 창조질서와 운행의 법칙이 있다. 하지만 인간이 물질의 순환과 흐름을 막고 역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며 집단 이익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고 있다. 핵폭탄 등 가공할 무기 실험,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 산림의 무차별 벌목, 수많은 댐으로 인한 물의 흐름을 막음으로 인하여 지구촌 곳곳에 물질세계의 막힘과 탄식이 있다(롬 8:22). COVID-19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 이상기온, 갈수록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진 등이 우연일까? 이미 우리 인간은 사방에서 경고음을 들으며 피해를 입고 있다. 이제 우리는 탐욕을 절제하며 청지기적 신분으로서 우주 만물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 한 방편은 생태계의 자연적 흐름과 순환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불통즉통(不通卽痛): 통하지 않으면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맺음 말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나머지는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크리스천들에게서 첫 단추란 대신관계이다. 늘 하늘을 향해 마음의 창이 열려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대몸관계는 우리 몸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잘 관리하는 것이다. 그 핵심은 기(氣)와 혈(血)이 잘 통(通)하게 하는 일이다. 대인관계는 이웃과 소통(疏通)을 잘 해야 한다. 능동적 만남은 피차간에 긴장과 갈등을 줄이고 원활한 조직사회를 만들어가며 행복감을 주게 된다. 대물관계에서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가? 를 반문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이 눈앞의 쥐꼬리만 한 탐심 때문 창조질서를 깨고 도전하면 반드시 그 해(害)를 받게 되어있다. 작은 이익 때문에 더 큰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면 통탄할 일이다. 이렇듯 인간사에서 불통(不通)은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서 진통을 낳게 되고, 진통은 고통을 가져오기에 우리는 통즉불통(通卽不痛)의 삶과 생활 환경이 되도록 열심을 내야 한다. 이는 우주적 선교의 한 일환이다.

jrsong007@hanmail.net

03.25.2023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