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온 세계인이 패닉(panic) 상태에 놓여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가 지구촌 곳곳을 쓰나미처럼 삼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나올 것 같은 상상들이다. 문제는 이 사태가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큰일이다. 민심은 동요하고 사람들은 긴장과 두려움 속에 숨을 죽이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인가?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눅21:10-11). 아무튼 지금 시대는 영적으로도 너무 어둡고 혼미하다. 이런 때에 본토 아비 집을 떠나 있는 선교사들에게는 더욱 외롭고 고통스럽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영롱하게 빛난다. 부름 받은 선교사들은 세상이 어려울수록 하늘의 별처럼 살이야 한다. 그것은 문제에 휩쓸리지 아니하되 참 빛을 발하는 것이다. 어떤 조건과 상황 속에서도 은은하게 그리스도의 빛을 발할 수 있는 선교사는 어떤 사람일까?
밤이 깊을 수록 별 빛은 영롱하게 빛난다.
지금 시대는 영적으로 어둡고 혼미하며 민심이 흉용한 때이다.
선교사는 어떤 역경 하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의 빛을 발해야 한다.
1. 확실한 소명(召命)
선교사는 분명한 소명이 있어야 한다. 소명이 불확실하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고난 시에는 뿌리 채 흔들리게 된다.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은 소명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거침없이 선지적 나팔을 불었다.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이는 왕이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에로의 부름을 의미하는 말이다. 세계적인 변증가이자 작가인 오스 기니스(Os Guiness)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데 투자된다. 이 때문에 소명이야말로 인간경험 중 가장 포괄적인 방향전환이요 가장 심오한 동기를 유발하는 것, 곧 모든 역사에서 삶의 궁극적인 이유(Why)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인간은 가슴 깊숙한 곳에는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싶은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존재의미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명 없이 사명 없고, 사명 없이 무슨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인가?
2. 불타는 열정(熱情)
선교사는 불타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열정이 없이는 주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표출할 수 없다. 메마른 관념적 신학으로는 영혼들의 가슴 속에 불을 붙일 수 없다. 하늘의 별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을 초개같이 던진 열정의 사람들이었다. 열정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다. 불타는 열정이란 자기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것은 “미쳐야 미친다”라는 세속 언어처럼 올인(All In) 하는 것이다. 열정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 논어에 있다(子曰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이를 의역하면 도(道)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미치는 것만 못하니라.” 현대그룹을 일군 고 정주영 회장은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새벽을 깨우면서 늘 새로움을 추구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은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비록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을 일구었다. 사람이 돈 버는 일에도 이렇게 열정으로 인생을 불태웠는데 소위 하늘의 대업인 선교사역을 적당히 할 수 있으랴! 열정이 없는 사역은 야자수 나무 잎에 스치는 바람처럼 그저 시늉만 내다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3. 온유한 심성(心性)
선교사는 온유한 심성이어야 한다. 온유하지 않고는 어떻게 문화와 기질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온유(Meekness)의 원어적 의미는 원래 비천한고 억압된 노예상태에서 다시 전의(戰義)되었다. 즉, 자기를 비천한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며 이웃에 대하여 노하든가,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이는 마치 꾸겨지지 않는 비단 천과 같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해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용서하고 이전처럼 편하게 대하는 것이다.
온유한 심성이란 타고난 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서 자기가 죽고 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성화된 성품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도 요한이다. 그는 성품이 얼마나 다혈질이었는지 예수께서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다. 허나 그가 주님과 동행함으로 후에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바울은 어떠했는가? 그는 매우 거칠고 사나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유언 격으로 쓴 디모데 전, 후서를 읽어보면 성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어떻게 바울이 고전13장 같은 사랑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교사는 늘 온유한 심성으로 변화되어가야 한다. 이렇게 자아의 존재적 변화 없이는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낼 수 없다.
4. 단순한 생활(生活)
선교사는 그 생활이 단순해야 한다. 생각과 삶의 자세가 단촐 할 때 기동성이 있다.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않고는 단순한 삶을 추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전도여행에 파송하시면서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 말라"(막6:8-9). 이 말씀은 본질을 위해서 비본질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예수님처럼 사신 분이 계셨다(無所有)를 주창한 법정(法頂)스님이다. 2010년 그분이 입적(入寂)하기 직전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을 하지 마라. 수의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관(棺)도 짜지 마라.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 위에 내 몸을 놓고 다비 해라. 사리도 찾지 마라. 남은 재는 오두막 뜰의 꽃밭에 뿌려라.” 법정 스님의 이 정신과 삶의 방식은 살지고 기름진 현대인들에게 지금도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선교사들이 수시로 점검해보아야 할 자세이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이 있다. 따라서 조금만 방심하면 땅의 것에 집착하게 되고 집안은 어느새 잡동사니가 쌓이게 된다. 선교사는 모름지기 그 사고체재와 삶이 단순해야 한다. 선을 가장한 사업가적인 선교 양태는 절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기 꾀에 빠져 소유물의 포로가 되기 쉽다.
맺음말
세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요하지 않다. 인간세계는 아무리 문명이 발전되고 물질문화가 풍요롭다 해도 죄와 사망의 덫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첫 일성으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20:19)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세상이 패닉상태에 빠져 있다. 누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를 구원할고? 우리는 과학자요 의학자들이 속히 대응할 백신을 개발하도록 기도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의 종들이 나셔서 뭇 심령들을 다독이며 살펴야 한다. 특히 이방 땅에서 고독하게 분투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교사 자신이 먼저 문제의 한복판에 서서 섬기는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시로 소명을 체크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불타는 열정으로 양떼를 품으며 누구에게나 온유한 성품으로 대해야 한다.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는 아까울지라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단호히 청산할 필요가 있다. 별과 같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jrsong007@hanmail.net
03.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