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災難)과 선교

송종록 목사

(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하늘이 노(怒)하셨는가? 아니면 대자연이 인간에게 반항하는 것일까? 코로나19의 광풍(狂風)이 무섭다. 그간 중국 우환과 후베이성에서 주로 창궐하던 것이 이제는 세계 6대륙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지난 2월 초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웃나라 중국의 사태를 관망하며 “설마 우리에게까지 오기야 할까?” 라고 생각했다. 헌데 정작 한국, 이태리, 이란, 일본 등이 코앞에 불이 떨어졌다. 속담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중앙방역대책본부 발표에 의하면 한국은 3월 3일 오후 4시 기준 확진자가 5,186명이며 사망자는 29명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1월 20일 국내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지 43일 만에 5천명을 넘긴 것이다. 이로서 중국에 이어 한국의 모든 학교들이 휴교를 한 상태이다. 종교기관들도 문을 닫아가고 있다. 거리는 한산하고 많은 이들이 방콕상태에 있다. 사람이 사람을 피하고 나라가 나라를 경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촌 전체가 이렇게 휘청거린 적이 있었던가? 참으로 어려운 싸움이다. 의료인들이 최 일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렇게 위중한 때에 교회의 선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1. 인류와 재난의 상관관계

   

기나긴 인류역사를 돌아보면 전쟁과 재난이 늘 함께 병행해왔다. 인류에게 이런 환난이 없었던 태평시대를 꼽으라고 하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전쟁과 재난은 대부분 인간의 집단 이기심과 연결되어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현대를 살펴보자. 인류는 20세기 들어 ‘개발’이라는 용어를 앞세워 경쟁적으로 문명을 발달시켜왔다. 그 결과로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에서 보면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고 희생되어왔다. 이는 지구의 기후변화를 유발하며 자연으로부터 부메랑(Boomerang)적 도전을 받기도 한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19도 예외일 수는 없다. 아무튼 전쟁과 재난에 대한 공통적 분모를 차지하는 요소는 긴장, 불안, 고통, 죽음, 이데올로기, 흑백논리, 종교 간의 갈등 반목 파괴 등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영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가?”라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고 있다(약1:15). 결국은 죄의 문제가 여러 형태의 사회적인 현상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 통전적 선교(integral mission)를 필요로 하는 시대

   

현대 개신교 선교는 크게 두 가지 선교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다. 하나는 영혼구원과 다른 하나는 사회구원이다. 전자는 개인의 구원과 교회개척 및 확장을 강조한다. 후자는 사회의 구원과 생태계의 구원을 강조한다. 전자는 성서를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인 반면 후자는 상황을 속에서 성서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현대선교 양극화의 노선위에서 나아가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양극화가 아니라 통전적인 선교를 추구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or)의 양자택일의 논리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하나로 묶는 통전의 논리이다. 이러한 사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한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고(preaching), 제자들을 가르치시고(teaching), 병자들을 고치셨다.(healing) 이 세 가지 사역은 매우 통전적이다. 이를 요약하면 복음전도와 사회봉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통전성은 복음의 통일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문화의 다양성을 말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통전적 선교(integral mission)를 필요로 한다.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이라는 보수적인 선교 패러다임으로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미시오 데이(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와 세상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가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고 했다. 결국 성육신화 하신 주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통전적 선교로 그 사랑을 실천하였다.

 

코로나 19가 광풍처럼 6대륙 전역으로 휘몰아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선도하지는 못할 망정 지탄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난세(亂世)일수록 선교는 영혼들에게 초점을 둔 통전적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 

 

3. 로잔 대회에서 언급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20세기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획을 긋는 국제대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잔대회(Lausanne Congress)이다. 제1차는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1974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열렸다. 그 때에 대회의 결과물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이 채택되었다. 이 선언문은 세계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잘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아쉬웠던 것은 재난지역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피상적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1989년 7월에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린 제2차 대회에서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 마닐라선언문(The Manila Manifesto)중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할 때 우리는 사랑의 봉사에 참여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그 나라의 요청에 헌신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제3차 로잔대회는 198개국에서 4,200명의 대표가 2010년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다. 그 때에도 케이프타운(The Capetown Commitment)서약이 채택되었다. 제1부 강령 중 10항의 내용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확증한다. 이 둘은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우리의 교리들,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필수적인 표현들이다.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전체성 가운데 우리를 변혁시켜야만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4. 재난이 있는 곳에서의 선교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선교와 구제를 구분하고 우선순위를 선교 쪽에 두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구제의 목적이 영혼구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 불쾌할 수 있다. 이러한 발상은 상대방이 그리스도께도 가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동기 자체가 이중성을 띠기 때문이다. 선교적 구제란 순수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예수사랑”이라는 동기 하나면 충분하다. 설사 상대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봉사했으면 그 자체가 이미 목적 달성을 한 것이다. 따라서 재난이 있는 곳에서의 선교는 단순한 동기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 된다. 그 방법은 통전적 선교를 지향하되 마가복음의 주제처럼 철저히 섬기는 종으로서의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 심령들 속에서 운행하실 것이다. 

 

맺음 말

 

인류 역사는 고난을 이겨내며 여기까지 흘러왔다.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 힘든 것은 목숨이 위협 받는 일이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어떤 종(種)의 동물이건 주어진 수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천적(天敵)에게 먹잇감으로 희생당하거나 혹은 전쟁, 기근, 질병 등으로 중도에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20년 들어서 코로나19사태로 우리 조국과 세계가 큰 시련 가운데 놓여 있다. 이렇게 재난이 밀어닥칠 때에는 개별 인간이든 국가이든 당황하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한다. 재난의 현장은 처참하다. 거기에는 평화가 없다. 대신 두려움과 고통과 한탄이 지배한다. 사람이 사람을 기피하며 나라가 나라를 경계한다. 이렇게 개인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위중한 때에는 무엇보다 선교적 구제가 시급하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심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 결의로 이미 3차에 걸쳐 로잔선언문에서 언급이 되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사회적 책임에 둔감해서는 아니 된다. 세계교회는 심장의 박동소리, 양심의 소리, 성령의 소리에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통전적 선교로 이 난세에 극복해야 된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한 몸체이기 때문이다.

jrsong007@hanmail.net

 

03.0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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