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베트남이 급부상하고 있다. 통일 베트남은 인구 1억을 내다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평균연령 28세로서 젊고 역동적이다. 단적인 예가 축구경기에서 나타났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팀은 2018년 아시안 게임 축구 4강, 2018년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2018년 AFF 스즈키컵 우승이었다. 이 성적은 전무후무한 결과였다. 경기가 있었던 날은 전 베트남인이 거리응원과 TV 화면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이후 젊은이들은 밤새도록 경적을 울리며 오토바이 행진을 하였다. 이는 마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본 분위기였다.
이것이 어디 스포츠뿐인가? 해외 투자 기업들이 들어오고 관광객들도 몰려오고 있다. 이참에 우리는 베트남(越南)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과 미국 입장에서는 베트남을 지구촌의 230개 국가 중 한 나라(One of them)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과거에 씻을 수 없는 전쟁의 상흔을 남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들의 아픈 상처를 싸매며 함께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단순한 경제나 문화 교류 차원을 넘어서 선교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베트남은 1억을 내다보는 세계 13번째의 인구대국이다.
베트남은 1,2차 전쟁으로 인하여 약 7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교회는 그 상흔이 치유되도록 기도하며 복음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
1. 일반적 현황
베트남(Vietnam)은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의 정회원국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에 위치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남북으로 길게 잡아 늘인 S자 모양으로 생겼으며 그 길이가 1,650 km나 된다. 국토가 길게 뻗어 있어서 기후가 다양하다. 북부는 아열대 기후로 사계절이 있다. 남부는 열대기후로 일년내내 덥고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지며 스콜이 있다. 면적은 약33만341km²이며 3/4이 산지와 구릉지이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CIA the Worldfactbook에 따르면 2017년 베트남의 인구는 9,616만163명으로 1억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는 세계의 13번째 인구대국에 해당된다. 인구의 34.9%가 도시에 살고 있다. 베트남 정부가 공인한 민족 수는 54개이다. 전체 인구의 85.7% 정도가 비엣인(Người Việt, 越人 越)이라 불리는 킨족(Người Kinh, 京族)이다. 이로서 킨족이 사실상 베트남인인 셈이다. 나머지 53개 민족은 소수민족이고 그중 가장 많은 타이족조차 1.9%밖에 안 된다.
베트남은 크게 전국을 8개 지방으로 나눈다. 수도는 하노이이며 최대 도시는 호찌민시이다.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시장경제체제를 가진 명목상 공산주의 국가다. 베트남의 공식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로마자로 적는다. 베트남어는 단철어(單綴語)로 성조에 6성이 있다.
2. 전쟁의 역사
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맹렬히 추진되었다. 1946-1954년까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다. 베트남은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미국에 맞서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다. 즉,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0년의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다. 이처럼 막강한 화력과 인력 외 한국 등 9개국의 참전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 속에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리게 되었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함으로서 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 단일 국민의회는 1976년 7월 역사적인 통일 베트남 수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였다.
3. 전쟁의 상흔
위키백과 자료에 의하면 이 전쟁으로 미군은 무려 58,315여 명이 전사 및 실종됐다. 부상 약화로 수년 후 사망하여 집계가 안 됐거나 심한 부상을 입은 군인까지 합치면 참전병 300만여 명의 1/15인 20만 명에 달한다. 게다가 이 전쟁으로 인해 전사자 및 유족처리, 미국 사회에 다수의 상이병사,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사회 부적응 등으로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국군은 어떠한가? 1964년에 의무중대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부터는 맹호, 청룡부대를 파병하였고 1966년에는 백마부대의 파견했다. 총 인원은325,517명이다. 이 중 사망자 5,099명, 사상자 11,232명, 실종자 4명이며 이밖에 159,132명이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아왔다.
이에 비해 베트남의 피해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베트남 노동부와 전상자복지부는 보고서에서 제1차, 2차의 20여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군인 및 민간인 총 3백만 명이 숨졌으며 약 4백만 명이 아직도 부상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다.
4. 한국과의 관계
역사와 문화적인 면에서 베트남은 한국과 매우 비슷하다. 중국인들은 우리를 동쪽 오랑캐(東夷, 동이)라고 불렀고, 베트남사람을 남쪽 오랑캐(南蠻, 남만)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에서 같은 입장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창기의 불교, 유교, 기독교도 중국을 통해서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현대사에서는 양국이 모두 서구 열강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그 여파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의 이념논쟁을 통해 희생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제 2차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였고 한국이 참전함으로 불행한 역사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과 베트남 관계는 80년대 중반까지 원수지간이었다. 다행히도 베트남이 개방정책을 폄으로 1992년 4월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 때 양국 연락대표부 설치를 합의하였고, 12월에는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양국의 불행에 대해 사과를 하였고, 2001년에는 양국의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였다. 이제는 선린 우방으로서 한국 정부도 신 남방정책의 일환으로 베트남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맺음 말
베트남이 용처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비상하고 있다. 이 나라는 불란서, 미국, 중국이라는 대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를 거둔 나라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제 통일베트남은 전쟁의 아픔과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젊은이들의 오토바이 행진을 통해 저들의 기상을 본다. 하지만 이 나라는 한국을 발전 모델로 삼고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저들의 손을 굳게 잡아 주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기대한 바이다.
동북아의 귀퉁이에 위치한 대한민국은 위로는 북한과 4대 열강에 포위된 채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다. 이 때에 베트남과 함께 미래를 도모한다면 새로운 출로를 활짝 열 수 있다. 두 나라는 정서, 문화, 역사적인 면에서 동질성이 크며 상호 보완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때에 우리는 서로 간에 표면적인 부국강병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영적 혜안을 열어 베트남 영혼들을 위로하며 아픈 상처를 싸매주어야 한다. 장차 저들이 주의 일꾼으로 우뚝 솟아 인도차이나 반도를 넘어 서서 세계선교를 위한 정병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jrsong007@hanmail.net
05.25.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