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금년은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된 해이다. 그간 우리 민족은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여기까지 왔다. 일제 36년의 압제 속에서 해방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반도는 남북으로 잘리고 말았다. 이념적 대립은 6.25라는 동족상잔의 아픔은 낳았다. 포화의 잿더미 위에서 우리 선조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도 풀뿌리를 뜯어 먹으며 산업화의 초석을 놓았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우리 조국은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이제 우리 한국은 국력 12권 안에 들어 있는 선진나라가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부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한민족 독립은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흑암의 권세 속에 있고 남북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동족끼리의 힘을 소진하지 말고 한걸음씩 통일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3.1운동이 남긴 정신이다.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시간의 열차(Time Machine)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 때의 거친 숨소리, 만세 삼창이 들리는가?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 선열들의 결기가 느껴지는가?
1. 역사적 배경
일본 왜구(倭寇)들은 1592년에서 1598년 까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켰다. 저들은 7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을 살상하며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1895년에는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군의 암살단에 의해 시해(弑害)되었다. 일제는 1905년 11월에는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듬해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빼앗았다. 1907년에는 조선 군대를 해산하고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폐위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에 국권을 빼앗았다.
폭력에 의해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와 정치, 사상의 자유를 박탈했고 생존권을 위협하고 한국인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까지 억압하였다. 도대체 일제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 민족과 국가를 이렇게 수탈하며 압살해왔단 말인가?
2. 삼일운동의 거사
1919년 1월 21일에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셨다. 사람들 귓전에는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팽배했다. 그렇지 않아도 울분이 차 있었는데 그 소문은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되었다. 마침내 거사는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과 전국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1년여에 걸쳐 우리나라 안과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까지 확산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삼일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교도 16명, 천도교도 15명, 불교도 2명이었다. 기독교 인사 16명을 직분별로 보면 목사 10명, 장로 2명, 전도사 3명, 집사 1명이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 간 독립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2,023,098명, 피검자 46,948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가옥파괴 715동, 교회당 파괴 47개소였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남북한 1,600만 명 중 약1.3%에 해당되는 20만-22만 정도였다. 이에 비해 1919년 4월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 불교, 천도교, 유교도의 총수 1,556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는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 세력 면에서 25-38%, 체포· 투옥면에서 17-22%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극히 소수의 한민족 크리스천들이 3.1운동을 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유관순 (柳寬順)열사의 기도
삼일운동의 대표적인 사람은 류관순 열사이다. 그녀는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초등부 3학년에 편입했다. 1919년에는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그녀는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일제의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열사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선교사들의 역할
삼일운동 당시 주한 외국 선교사들은 로마가톨릭의 54명을 포함하여 400여 명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친일적 인사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정교분리론에 입각해 정치적 중립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전개되면서 저들은 일제의 폭력을 목도하며 의분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날조된 105인 사건 이후 “만행 앞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고 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에서 이런 인식은 더욱 심화된다.
시위자를 돕던 마펫(S. A. Moffett)은 일제의 만행이 훈족처럼 잔인하다고 비난하였다. 모우리(E. M. Mowry)는 독립선언서를 영역하고 피신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는 죄명으로 6개월간 투옥과 강제 노동을 당하였다. 캐나다장로교회는 1919년 6월의 총회에서 일본의 야만적 고문에 강경한 반대를 결의하였다. 원한경(H. H. Underwood)은 제암리교회 방화 살인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여 그 사진이 미국 하원 의회록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YMCA의 질레트(Gillett, 吉禮泰)도 시위 사실을 영국에 알렸다가 조선에서 추방되었다.
이렇게 선교사들은 만세운동에 대한 실상과 일제의 만행을 촬영하고 기록하여 고발함으로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여론 형성에 기여하였다.
5. 3.1운동의 영향
이 운동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강요된 포학한 무단식민통치로, 실의와 좌절 속에 빠져 있던 한국민에게 민족 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해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서 국민주권정부가 일어나고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또한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민족운동 기반이 강해졌고, 국산품애용, 근검, 절재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하였다. 나아가 삼일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수단인 무단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어 비록 가식적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은 해외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로 중국의 5.4 운동 그리고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 역시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편지에 3.1운동과 유관순 열사를 찬양하며 이들을 본받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맺음 말
삼일운동은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형성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정의·자유·평화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대에 둘 수 있다면, 민족적 양심은 자주·평등·해방을 목표로 한 독립국가· 민족자주의 건설에 있었다. 우리는 3.1운동에 참여한 선진들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신앙과 나라 사랑을 일치시킨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이는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노선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올바른 신앙이란 민족과 국가 사랑을 수반한다. 우리는 내일도 중요하지만 오늘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분단된 한반도는 비극의 상징이다. 어언 70년이 흘렀다. 우리에게 완전한 독립은 아직 오지 아니 했다. 이번 100주년이 된 3.1절을 맞이하면서 우리 한민족 크리스천들은 자아와, 가정과, 교회의 담을 넘어 조국을 응시해야 한다. 그리고 피 묻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선열들의 숨결과 신앙과 행동을 본 받아야 한다. 유관순 열사의 기도소리가 귓전을 때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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